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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주 칼럼] DMZ 철책선을 따라 걸으며…

등록 2015-05-26 18:54수정 2018-05-11 15:20

5월의 땡볕에 임진각으로 향했다.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 여성의 날’인 5월24일을 맞아 세계 여성들이 분단의 나라인 코리아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육로를 통해 걷겠다는 기획이었다. ‘세계여성걷기 대회’(위민 크로스 DMZ)는 그렇게 추진되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일랜드의 메어리드 매과이어와 라이베리아의 리마 보위 그리고 세계적인 여성학자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주축이 되어 마련된 행사였다. 이런저런 염려와 반대 등 행사 전부터 부정적인 말들이 오갔고 그 가운데는 일리가 있는 것도 있고 부적절한 것도 있고 억지인 것도 있었다. 그래도 여든두살의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어렵게 남과 북 정부의 승인을 얻은 행사다. 판문점을 통과해 걸어오는 세계 15개국에서 온 여성들을 마중하여 같이 비무장지대를 걸어본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친구들 여남은명이 참가신청을 내고 소풍 가는 기분으로 김밥과 삶은 달걀, 과자 등을 싸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파주가 가까워지자 행사를 반대하는 단체들의 현수막이 곳곳에 나부끼고 확성기로 북으로 가라고 저주 섞인 고함을 지르는 무슨 부대, 무슨 연합의 소음이 울려 퍼졌다. 임진각 근처 평화공원은 평화로웠다. 소풍 나온 가족들과 유모차에 아기들을 데리고 거니는 젊은 부부들, 자전거 동아리들의 대회도 열리고 있었고 새파란 하늘 위로 갖가지 연을 날리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곳곳에 쳐져 있는 그늘막엔 열두시가 되기 전인데도 연인들이 껴안고 잠들어 있기도 하고 이른 여름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는 동안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기독교단체, 여성단체의 안내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개인참가자들은 따로 등록을 하였다. 수녀님, 원불교 정녀님, 외국인들도 보였다. 대규모 소풍 같은 분위기가 걷는 내내 계속되었다.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사람, 오카리나를 부는 사람도 있었다. 동네에서 자주 본 대학교수도 만났고 수십년 만에 만난 대학 동기도 있었다. 주최 쪽이 부탁한 것은 딱 한가지. 주변에서 횡포를 부려도 맞대응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염려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 경찰들이 동원되어 걷는 여성들을 보호하고 있어서 그들이 걷는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중간에 비무장지대는 걸을 수 없고 북에서 내려오는 여성들도 판문점을 경유하지 못하고 경의선 육로를 따라 버스로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비무장지대를 걸어본다는 애초의 기대는 사라졌지만 철책선을 따라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미리 가 있는 행사 반대 단체들이 소리를 질러대었지만 네시간에 걸친 행사는 평화롭고 즐겁게 끝이 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행복으로 알고 산다.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일상을 핍박하는 것은 분단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루하루의 삶의 고단함이나 취업 결혼 노년 빈곤 가족관계 등 복잡다단한 일상에 허우적거리며 산다.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고 그것이 70년이나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종종 잊고 살 수밖에 없다.

아침 신문에서 우크라이나의 스물여덟살 여성이 군대에 자원입대한 동기에 대해 개인의 꿈보다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이 우선이라고 한 말이 놀랍게 가슴에 와닿았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자신의 행복이나 꿈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나 자신 너무 잊고 살지 않았나 싶었다. 거대담론이 때로는 더 큰 전쟁을 키워내고 이쪽의 정의와 저쪽의 정의가 부딪칠 때 개인의 존재는 무의미해지는 것을 역사를 통해 겪어 보았기에 통일을 마음 저쪽으로 치워두고 살았던 탓이 아닌가 싶었다. 아마도 분단이 우리 민족의 뜻과 상관없이 만들어졌듯이 통일도 우리 손으로 해결될 수 없으리라는 열패감이나 무기력함이 우리 모두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선주 언론인
김선주 언론인
온갖 상념에 잠겨 한반도를, 평화, 무기 없는 세상, 여성들이, 어머니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며 테레사 수녀의 말을 기억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는 것’이라는 희망을 향해 오랜만에 마음을 열어본 뿌듯한 하루였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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