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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세 도시 이야기 / 김병익

등록 2015-05-21 18:20수정 2015-05-21 21:00

내가 이 세계가 숨긴 불평등 구조를 확연히 배운 것은 두 지리학자가 쓴 <빈곤의 연대기>에서였다. 소득 불평등은 후진국일수록 내부적 실패 이상으로 외부적 원인에 크게 작용받는다는 점을 책은 강조한다. 우리도 노동착취와 불공정 거래를 다른 나라에 강요하고 있지 않은지, 참으로 두렵다.
내키는 대로 책 읽는 버릇 덕에 천문학 책에서 엉뚱한 ‘네메시스의 복수’란 살벌한 말을 얻었듯이 지난봄에는 후쿠시마의 핵 공포 속에서 일상의 삶을 사는 지식인의 글 가운데 ‘인간의 불평등’이란 거창한 말과 만났다. 염무웅의 ‘독서록’에서 발견한 사사키 다카시의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는 3·11 후쿠시마 재앙으로 인한 ‘종말론적’ 위험 속에서 치매를 앓는 아내를 간호하며 관료의 무책임과 원전의 위협을 증언하는 스페인문학가의 일기인데, 그 독백이 일본인 특유의 자제하는 담담한 문체여서 실감이 오히려 더했다. 거기서 문득 “세상에 태어나면서 이미 패배가 정해진 사람들이 있다”란, 차라리 체념적인 구절이 눈에 박혔다. 사사키는 그 얼굴을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보았지만 그 대목을 읽는 나는 유니세프가 아프리카 난민 후원을 호소하는 굶주리고 병든 아기들과 한없이 무력한 그 엄마들의 슬픈 얼굴들을 떠올렸다. 이 광고를 보고 아내는 후원 계좌를 하나 더 보탰지만 나는 미국 고고인류학자 플래너리와 마커스의 공저 <불평등의 창조>를 구입했다.

1000쪽이 넘는 이 책은 세계 곳곳의 선사시대 이후 인류사가 찍은 흔적들을 조사해 인간이 채취 사회로부터 농업 정착 사회로 발전하면서 “성과 기반의 사회에서 세습특권을 허용”하게 되고 여기서 사회적 불평등이 일기 시작했음을 추적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재능과 성격으로, 그래서 드러날 태생적 불평등은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 능력과 지위의 혜택이 상속, 세습된다는 데에 있었다. 이 결론은 이 책의 제사(첫머리 인용 노래·시·글)로 인용된 루소의 “인간은 자유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인간은 어디서나 구속당하고 있다”란 간명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외친 프랑스 대혁명 전에, 그리고 봉건 신분의 세습보다 부의 상속을 강화한 영국의 산업혁명 전에, 불평등의 보편성을 통찰한 루소의 지혜가 3세기 후의 연구로도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오늘날의 이 세계가 숨긴 불평등의 구조를 확연하게 배운 것은 우리나라의 두 지리학자 박선미와 김희순의 <빈곤의 연대기>에서였다. 두 저자는 ‘불평등의 국제적 구조’라는 신선한 관점으로 현대 세계의 불평등 현상을 분석하고 전부터 내게 회의적으로 보였지만 그 실제를 잘 모르던 ‘신자유주의’ ‘세계화’ ‘다국적기업’이란 21세기의 불순한 추세들이 지닌 문제성과 그 정체를 밝혀주었다. 두 학자의 소개에 의하면 세계사적 ‘대분기’를 이룬 1820년대 선/후진국 간의 평균 소득 격차는 6 대 1이었는데 100년 후 70 대 1로 급격히 벌어졌다. 두 차례의 전쟁 후 ‘인류사에서 가장 낭만적인 시대였던 1960년대’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그 격차는 더욱 커졌다. 불평등 무역 구조의 폭력과, 그 적절성에 대한 고려 없이 선진국형 구조조정을 강요한 아이엠에프 등 국제금융기구의 횡포, 20세기 종반을 휩쓴 국제관계의 변화와 컴퓨터에 의한 금융거래의 초국경적 자유유통 때문이었다. 1990년 미국 노동자의 한시간당 평균임금은 6.98달러지만 나이키 티셔츠를 생산하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는 하루 동안의 노동의 대가가 1.03달러로 시간 기준으로 55분의 1이었다. 스위스의 경제학자 장 지글러는 “2000년 7억5000만명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2008년에는 그 숫자가 8억5400만명으로 늘어났고 지구상에는 5초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 1명이 기아로 죽어간다”고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분노에 젖어 외치고 있다.

소득 불평등의 이유는 우선 국내적 여러 모순에 그 탓을 돌려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가난하고 무력한 후진국일수록 내부적 실패 이상으로 외부적 원인에 크게 작용받는다는 사실을 <빈곤의 연대기>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가령, 우리도 그 피해를 입어 ‘해적국가’로 잘 알려진 소말리아는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소련과 미국의 지원이 중단되자 ‘먹을 것은 없어도 총은 많은 나라’가 되었고 굶주린 어민과 농민들은 그 총을 들고 어선으로 외국 배를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패국가지수’에서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이 나라의 “진짜 해적은 바다를 빼앗긴 소말리아 어부들이 아니라 그들을 해적으로 내몬 미국의 욕심과 세계은행이나 아이엠에프의 잘못된 조언”(189쪽)일지도 모른다.

국제관계의 안 보이는 이 횡포를 비판하면서 두 저자는 빈곤의 바닥으로 떨어진 세 도시를 그 실례로 들고 있다. 멕시코의 국경도시 시우다드후아레스와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그리고 예외적으로 선진국인 미국의 디트로이트가 그곳이다. 미국 쪽 엘패소와 국경선으로 마주하고 있는 후아레스는 “개발도상국의 추레한 모습과 선진국의 눈부신 풍요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마약으로 인한 세계 최악의 범죄도시, 한해 수천건에 달하는 살인사건, 노동착취와 부패 같은 근대적 악이 일상화된 곳”이다. 이 도시는 1994년 나프타(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 이후 옥수수 개방으로 살길 잃은 농민들과 어부들, 실직자들이 몰려들어 거대한 슬럼이 되었다. 방글라데시의 다카는 중국을 대신한 다국적기업들의 생산공장이 되어 가장 낮은 월 43달러(2010년)의 최저임금을 받으며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근로조건 속에서 일하던 봉제공장 노동자 1130명이 목숨을 잃고 2500여명이 부상당하는 참사”(2013년 라나플라자 붕괴 사고)를 당하는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런 도시들 중 하나가 되었다. 디트로이트는 우리도 선망해온 미국 ‘자동차 산업의 수도’였지만, 1980년대에 후발 국가들의 진입과 노동비용 감축을 위한 공장 이주로 사양화되어 2013년 “실업률이 급증하여 소비 악화로, 다시 도시와 도시노동자의 파산”을 선언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디킨스가 본 프랑스 혁명기의 파리나 산업혁명기의 런던과 달리,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세계의 빈곤층들은 더욱 빈곤해지고 불평등이 악순환하여 파탄하는, 후진국, 개발도상국 그리고 가장 풍요한 선진국 세 도시의 피폐해진 모습들이 이렇다. 그것은 한 나라의 빈곤과 불평등이 내부적 모순과 무능, 자본주의 체제와 탐욕만이 아니라 세계경제구조의 불공정한 관계에서도 크게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설명은 에티오피아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보내는 3만원의 귀중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넘어, “세계 불평등 구조를 생산하는 기제와 계층적인 노동분화 구조를 유지한 채 이를 은폐하는” 불공정한 선진 세계와 그 관계의 진상을 바로 볼 것을 권한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
나는 식민 통치에서 해방된 후진사회에서 분단과 전쟁, 쿠데타와 정치적 억압으로 고통스런 세기를 겪으면서도, 다른 후진 국가와 달리 ‘빈곤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던 우리 역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예외적으로 성공한 행운과 그 행운을 키운 데에는 우리의 노력과 지혜에 더불어, ‘자원의 저주’를 피할 수 있을 국토의 빈곤, 70년에 걸친 분단의 비극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은근한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러는 한편, 1970년대의 전태일 분신으로 충격받은 우리가 1990년대 중반 중남미에 진출한 의류공장에서 평화시장 못지않은 가혹한 노사 쟁의를 일으킬 정도로 그들 노동자들을 혹사했던 일도 기억한다. 최악의 기아선상에서 출발한 우리가 이제 신자유주의 선진 대열에 끼어들었다며 유신 시절의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자행했던 노동 착취와 불공정 거래를 다른 나라에 강요하며 더 심한 빈곤의 악순환으로 그들을 몰아가고 있지 않은지, 참으로 두렵고 걱정스럽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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