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국제시장>의 영어 제목은 <나의 아버지에 대한 찬가>인데, ‘찬가’라는 말이 영화의 기본코드를 잘 보여준다. 찬가 속에서 역사의 불편한 진실도 피해자들 고통도 망각되어 사라진다는 것은, 전쟁과 권위주의의 잔혹한 역사가 되풀이될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개인의 독립적 개성이나 인권을 소거시켜버리는 극우적 사고방식을 현대적으로 포장하여 다시 유포시키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밑으로부터의 역사, 피해자 본위의 역사를 서술하는 게 우리 몫이다
완벽하게 객관적 역사서술이란 아마도 불가능하다. 만인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몇 가지를 뽑아 어떤 서술의 틀로 묶어준다는 것은 이미 취사선택과 설명의 주체, 그리고 그 주체의 어떤 입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주체가 살아가는 삶 안에서는 이미 정치가 녹아 있기에 역사라는 서사는 늘 정치적이다. ‘나’는 타자에게는 ‘나’와 같은 삶을 살며 같은 정치적 입장을 취하라고 요구할 수 없기에 서술 주체들의 다양성만큼 역사서술들도 당연히 다양해야 한다. ‘나’는 아무리 진보를 내세운다 해도 보수적 역사 서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민주사회로서 당연하다. 그러나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사회가 성립되자면 한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아무리 자기 입장대로 역사를 서술하더라도 노골적 사실 왜곡이나 자명한 가해-피해 관계에 대한 도외시를 금기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적 역사서술이라 해도, 당연히 과거의 불편한 면면들을 자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맞다. 예를 들어 보도연맹 학살 등 한국전쟁 시절의 한국 정부의 국가범죄나 반인권적 연좌제 운영 등을 이야기하면서, 좌파진영 내지 북한 인민군도 우파인사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도 희생시키는 등 사실상 연좌제를 실행하는 경우들이 있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예컨대 1990년대 말까지 이어져 온 정부 보안기관들의 정치범 고문을 이야기하면서, 반대편에 1997년도까지 일각의 운동권 학생들이 벌이곤 했던 ‘프락치 용의자’ 폭행·치사 사건도 동시에 언급하는 게 옳다. 병영국가에서 저항자들의 인권의식 수준도 결코 군사문화의 야만성이 만들어낸 ‘평균’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모든 이들의 인권 감수성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의 역사도 자성적이어야 하는데, 보수의 역사서술에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흥행에 크게 성공한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보면, 자성은커녕 남한의 주류에 불리한 사실관계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가 역력히 보인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할리우드를 능가하는 듯한 기술과 특수효과를 자랑하는 이 영화를 보면, 내용적으로는 70년대 국책영화가 부활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 즉 <나의 아버지에 대한 찬가>인데, ‘찬가’라는 말이야말로 이 영화의 기본코드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영웅찬양’ 코드의 북한 시각문화와 교묘하게 상통하는 부분마저 있는데, 이 찬가 속에서 역사의 불편한 진실도 피해자들의 고통도 다 망각되어 사라진다는 것은, 제국주의 전쟁과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의 잔혹한 역사가 다시 되풀이될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반성되지 않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진리를, 우리는 이미 잊은 것인가?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는 무일푼의 실향민 자녀에서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잡화점을 운영해 중산층으로 성장한 ‘승자’다. 그가 키운 아이들은 해외여행을 즐긴다. <국제시장>은 그의 ‘인간승리’에 바쳐진 찬가다. 그러나 이 승리는 덕수 개인만의 것도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축소판이자 상징으로 등장된다. ‘힘없는 약소국’인 대한민국 대통령의 계속 싸우겠다는 의지를 무시해 미국이 정전협정을 맺었다는 소식이 라디오로 퍼져 나올 때, 미군들이 던진 초콜릿을 먹어야 하는 힘없는 ‘소년 구걸자’ 덕수도 덩치 큰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꿈속에서 전쟁통에 잃은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아 진짜 ‘아버지’가 된 덕수는, 창문을 통해 국제공업도시가 된 부산을 바라본다. 덕수가 ‘아버지’로 성장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이 -고등학생들로부터 인종주의적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 ‘개도국’ 외국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중진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이 영화 이야기의 뼈대다. 이런 의미에서 아내와 논쟁하다가도 국기하강식 경례만큼 챙기는 덕수는 상징적이다. 그러나 한 개인을 국가의 분신으로 만들고 국가의 한 ‘분자’만으로 만든다는 것은 바로 전체주의 미학의 기본이 아닌가? 화려한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한 박정희 시대 식의 국책영화가 ‘국민영화’ 대우를 받는 요즘 같은 상황은, 나로서 섬뜩하기만 하다.
국가와 개인이 일체화되면 늘 벌어지게 되는 가장 무서운 일은 개인이 국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자율적·독립적·비판적 평가도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돼야 비판이라도 가능하겠는데, <국제시장>의 ‘아버지’ 위주의 세계에서는 국가라는 초(超)가부장으로부터의 독립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무비판성은, 베트남 파병과 관련된 부분에서 절정에 달한다. 덕수가 베트남에 기술자로 간다는 것을 오로지 ‘위험한 돈벌이’ 정도, 광부와 간호사들의 파독의 연장쯤으로 인식하지만 그 돈벌이 이면에 대해서는 그도, 그를 영웅화시키는 영화의 제작자도 고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베트콩이 미군기지에 폭파 ‘테러’를 저지르는 장면은 나와도, 미군이 베트남 마을들을 초토화시키는 장면을 영화에선 볼 수 없다. 한국 군인들이 베트콩을 두려워하는 베트남 농민들을 살려주는 구세주로 설정돼 있다. 이는 어떤 이념적 입장인가를 넘어, 특히 베트남에서 지금도 생존해 있는 한국군 잔혹행위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2차 가해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한국 파월군의 미화는 한국에 대한 일종의 ‘제국화’ 경지에 근접한다. 영화 서사의 시발점에 해당하는 미군에 의한 흥남철수와 쌍을 이루는 것이 바로 한 베트남 마을의 부두에서 베트남 민간인들을 구출한 한국군에 의한 철수 작전이다. 영화의 논리 차원에서는, 한국군이 미군의 ‘민간인 구제’를 본떠 행함으로써 한국이 -피점령지 베트남에 대해서는- 일종의 ‘제2 미국’, 하나의 ‘아(亞)제국’이 되는 것이다. 덕수의 여동생이 미국에 입양 가듯, 한국군이 ‘구출’한 한 베트남 여성은 한국으로 시집가기도 한다. 제국주의적 전쟁의 본질을 흐리고 국가범죄를 은폐시키면서, 이 서사는 매우 강력한 ‘아(亞)제국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역지사지의 차원에서 볼 때, 베트남 사람들이 이런 장면들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국제시장>은 가해자 입장에서 해석된 국가의 역사(國史)이자 가족사다. <국제시장>에서 보이는 국가의 상은 비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절대선’ 그 자체지만, 그 이상으로 개개인의 모든 삶을 ‘가족’이 전적으로 규정한다. 아이 뒷바라지로 일관되는 어머니는 지고지순하고, 선장의 꿈을 접고 가족에게 보탬이 되려고 독일로, 베트남으로 가서 자기 신체까지 희생하는 장남은 효자답고, 결혼하기 전에는 장녀로서, 혼인하고 나서는 아내로서 부모나 남편, 아이를 위해 전적으로 희생을 하는 영자는 부도(婦道) 그 자체고, 장난꾸러기 여동생 역시 전형적 ‘아이’ 노릇을 하고…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속에 녹아버린 유교적 가부장주의가 가족 구성원 각자에게 부여한 전형화된 역할들은 보이지만,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독립적 내면세계를 가진 ‘개인’으로서는 거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그들에게도 각자 나름의 자기만의 세계는 있겠지만, 이 영화는 오로지 그들에게 ‘효도’와 ‘부도’가 부여한 역할만을 전경화한다. 이런 전체주의적 방식으로 짜인 영화가 ‘대한민국 국민영화’로 대접받는다면, 우리가 참 위험한 사회에서 산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국가와 가족과 개인의 관계가 민주나 인권과는 어떤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은 단순히 보수적 입장에서 만들어진 한국 현대사 서사라기보다는, ‘국익’과 ‘가족’의 신성한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경제적 ‘성취’를 무조건 우선시하는 만큼 개인의 독립적 개성이나 인권을 소거시켜버리는 극우적 사고방식을 현대적으로 포장하여 다시 유포시키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또 박근혜 시대의 퇴행적 지배층이 선호하는 국가관이나 개인관, 인간관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에 맞서 밑으로부터의 역사, 피해자 본위의 역사 서술을 쓰는 것은 이제 우리 몫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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