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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위협받는 표현의 자유 / 박창식

등록 2015-05-05 18:42

정치적 의사 표현을 위한 방법으로 국기를 훼손하면 죄가 될까? 1984년 국제청년당 당원인 그레고리 존슨이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공화당 전당대회장 앞에서 성조기를 불태웠다. 레이건 정부의 외교정책에 항의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텍사스 주법인 성조기보호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나, 1989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5 대 4로 무죄를 결정했다.

대법원 판사인 윌리엄 브레넌은 “언론 자유의 참된 기능은 청중으로부터 불안과 불만을 야기하는 표현, 청중을 자극하는 표현을 과감히 허용하는 것”이라며 “미국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성조기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조차도 허용돼야 한다”고 밝혔다. 성조기 훼손이 바람직하든 바람직하지 않든 그것은 국가가 간섭하기보다는 국민이 알아서 할 영역으로 본 것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 가치가, 일부 국민의 성조기 훼손에 대한 불쾌감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몇 사람이 성조기를 태웠다고 미국이란 나라가 흔들릴 리도 없지 않나. 민주 국가에서 당연한 법리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한 청년이 집회에서 종이 태극기를 불태웠다가 경찰의 쥐잡기식 수사망에 올라 곤욕을 치르고 있다. 보수 신문과 종편들은 4월18일 세월호 추모집회를 보도하면서 “태극기를 불태우는 시위대”를 부각시켰다. 국기 문란과 종북이 의심되므로 잡아들여 엄벌하라는 투였다.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은 “태극기를 태우는 사진 봤나? 반정부 종북세력이 그만큼 많고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우리나라 형법은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를 훼손하면 처벌한다고 국기모독죄를 규정했다. 그러나 국가를 모욕하겠다고 작심하고 무슨 짓을 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주관적 목적을 입증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까닭에, 이 조항은 현실성이 별로 없다. 실제로 지목당한 청년은 한 인터뷰에서 집회를 폭력으로 가로막는 경찰의 행태에 항의할 목적으로, 길에 떨어진 작은 종이 태극기를 주워 불을 붙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형법상 국기모독죄는 미국 같으면 위헌 판정 감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청년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된 점이다. 보수 언론들은 청년을 비난하면서 그의 얼굴을 고스란히 노출했다. 거리 행인들의 움직임을 가볍게 스케치하여 전할 때도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는 게 신중한 자세다. 보수 언론들의 행위는 심각한 초상권 침해다. 뒷날 자유로운 재판이 가능할 때, 청년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다면 열에 아홉은 승소할 것이다. 경찰이 여기저기 헤집고 먼지털기 수사를 하는 것도 인권침해 소지가 크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곧 언론 자유다. 언론 자유에 대한 위협은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 된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또 한 가지 특징은 정치인과 언론인은 같은 주제를 같은 수위로 언급해도 문제되지 않는 반면에, 힘없는 보통사람들이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전단을 돌린 시민 박성수씨(그는 경찰에 개사료와 개껌을 뿌리고 부친 것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가 며칠 전 구속됐다. 세월호 침몰 직후에 정부의 구조 난맥상을 방송 인터뷰에서 비판했던 여성 홍가혜씨가 구속된 것도 마찬가지다. 2009년에는 경제 전망 분석 글을 쓴 누리꾼 박대성씨(미네르바)가 구속됐다.

박창식 논설위원
박창식 논설위원
언론 자유 측면에서 볼 때, 정치인이나 직업 언론인들이 희생되던 시대와 평범한 시민들이 곤욕을 치르는 상황은 어느 쪽이 더 나쁜가? 나름의 발언권을 쥔 집단은 그냥 두고 약한 고리를 표적 삼아 옥죈다는 점에서 당연히 오늘의 현실이 훨씬 문제다.

박창식 논설위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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