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발 찬바람에 한국 외교가 몸살을 앓고 있다. 아무리 찬바람이 몰아쳐도 선천적으로 체질이 강하거나 대비를 철저하게 하는 사람은 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이다.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4월 말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실체를 드러낸 ‘미-일 신밀월 시대’는 국제 문제에 어느 정도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했던 일이다. 중국의 경제·군사적 급부상을 우려해온 두 나라는 오래전부터 이번 정상회담의 초점을 중국 견제에 맞추고 착착 준비를 해왔다. 그 결과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나온 미-일 신방위지침이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사실상 타결이다. 두 나라가 이렇게 군사·경제 양면에서 중국 봉쇄에 힘을 쏟으면서 우리 외교가 매달렸던 일본의 과거사 반성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지금 우리 외교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 외교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아베 일본 총리가 함께 참석한 인도네시아의 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정상회의를 외교 문외한인 황우여 교육부 장관에게 떠맡긴 채 박근혜 대통령이 눈에 띄는 현안도 없는 콜롬비아·페루·칠레·브라질 순방에 나설 때부터 알아봤다. 반둥회의 기념 정상회의가 한창 열리고 있던 그 기간에 박 대통령이 방문 중이던 페루가 40년 전인 1975년 남북한의 비동맹회의 가입 외교전에서 우리에게 패배를 안겨준 바로 그 나라였다는 사실을 대통령은 알고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미-일 정상회담의 충격이 나라를 흔들고 있는 와중인데도 대통령은 남미 순방에서 얻은 병을 이유로 일주일여 동안 모습을 감췄다 나타났고, 외교 책임자는 여전히 한국 외교가 “중심을 잡고 잘 대처하고 있다”고 허장성세를 떤다. 일급 국가 비밀이랄 수 있는 대통령의 병세를 구체적으로 까발리는 것 자체가 경악할 일이지만, 세월호 7시간의 행적은 극비라며 꽁꽁 숨겨두고 있는 자세와도 너무 대조됐다. 나라 안팎의 곤경이 부담스러워 ‘칭병 잠적’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본발 외교 위기는 피하거나 허장성세를 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세를 냉철하게 진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실리를 위해 명분을 과감하게 후퇴시키는 것도 불사해야 한다.
먼저, 역사 문제를 일본 문제 해결의 입구로 삼는 원리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미-일 정상회담에서 드러났듯이, 미국은 일본의 과거사 반성보다 중국 견제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아베 총리도 그간 과거사 반성을 조건으로 관계 개선을 할 뜻이 없다는 걸 되풀이해왔다. 중국도 두 차례의 중-일 정상회담을 하면서 언제든지 우리 어깨너머로 일본과 거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런 상황에선 아베 정권이 끝날 때까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포기하거나, 역사 문제를 전제로 삼는 노선을 수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 문제로 일본과의 관계를 전면 중단하기엔 역사 이외의 몫이 너무 크다. ‘역사 우회로’를 찾아야 한다.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와 미-일 신방위지침에 대해서도 ‘역사 반성 없는 일본의 한반도 개입 반대’라는 심정론에만 매달릴 일이 아니다. 우리 안보는 지금 상당 부분 미군에 의존하고 있고, 한반도 유사시 미군은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이 유기적으로 연동해 대응하는 구조로 짜여 있다. 육군 중심의 주한미군과, 해군·공군·해병대 중심의 주일미군이 일체가 되어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 안의 미군 기지 7곳이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한 유엔사 후방지원 기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일본의 원활한 미군 지원이 오히려 우리 안보에 도움을 주는 측면이 있다. 더구나 박 정권이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사실상 무기 양도한 상태여서,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개입을 원할 때 반대할 힘도 없다. 일본의 개입이 싫다면, 미군 의존도를 줄이는 체제를 구축하든지, 최소한 전시작전권을 찾아오는 수밖에 없다.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이런 걸 알지 못하고 있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고 있으면서 침묵하고 있다면 비겁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나라를 위태롭게 하긴 똑같다.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트위터 @ohtak5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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