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인문학’은 모든 대학의 토대이자 핵심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문학 대신 한국 대학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취직’이다. 소위 ‘스카이’(SKY)에서부터 ‘인서울’에서 ‘지잡대’에 이르는 한국 대학의 위계는 엄격하지만, 이 위계는 취직이라는 정언명령 앞에서는 허물어진다. 취직하지 못한 채 졸업한 한 ‘스카이’ 명문대생은 졸업식장에 냉소하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한 ‘인서울’ 대학에서는 (취업) ‘경쟁력 있는’ 학과만을 남겨놓을 수 있게 학과 체계를 없애는 구조조정안을 만들었다 논란을 불렀다. 소위 ‘지잡대’를 배경으로 한 인기 웹툰 <복학왕>에서 학생들의 유일한 꿈은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다. ‘스카이’와 ‘지잡대’의 차이는 그 이름값의 위계가 취직과 직결된다는 데 있다. 일류라는 이름값을 지키고 싶은 대학생과 하류라는 이름값에 주눅 든 대학생이 서로 나누는 멸시와 동경의 물결 역시 그 원인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취직하는 곳의 이름값과 관련된다. 모두가 그 앞에서 불안을 공유한다.
실용학문들에 비해 취업률에서 뒤처지는 인문학이 대학에서 당하는 굴욕은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 가능하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교수나 학생이나 ‘비판’만 일삼고 ‘학교발전’에는 관심이 없으니 사라져야 한다는 식의 논의가 대학에서 공공연하게 제기되는 것이다. 확실히 인문학은 ‘비판’을 자신의 업으로 삼고 있으며, ‘학교발전’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적이다. 왜일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인문학은, 인간의 복잡다단한 측면을 쉽게 판단할 수 없듯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 역시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간단히 제시되고, 수용되고, 환호받는 개념들에 언제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그것의 본질이 뭔지를 따진다.
‘비판’한다는 것은 그렇게 천천히 꼼꼼하게 개념의 본질과 맥락과 역사를 살펴보는 일이다. 비판을 뜻하는 영어 ‘criticism’(크리티시즘)의 어원은 ‘양 갈래 길’이다. 이 양 갈래 길 앞에 선 사람은 위기(crisis)를 느끼지만, 여기서 그는 제대로 결정할 의무 역시 있다. ‘비판’은 그런 위기 앞에서의 결정을 의미한다. 인문학의 비판은 제대로 된 결정을 위해 먼저 제대로 읽겠다는 태도이고 자세다. 인문학이 텍스트 ‘읽기’를 핵심으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문학적 읽기의 테크닉과 비판적 자세가 없다는 것은, 그저 되는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편하게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사회문제들의 기저에는 바로 이런 반인문학적 태도가 있다.
인문학을 혐오하는 정서 저편에는 인문학을 상품화하고 대중화하는 흐름도 있다. 이 둘은 상반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동일하다. 연예인 패널이 없이는 제작되지 않는 텔레비전의 인문학 교양 프로그램에서부터 ‘콘서트’라는 이름을 붙여야만 하는 인문학 토크쇼나 강의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대중적 인문학은 교양 판타지를 보너스로 제공하는 완벽한 ‘엔터테인먼트’ 상품이다. 쾌락과 결합시킨 인문학 패키지는 지루하고 느린 읽기의 시간, 기존 질서를 해부하고 파헤치는 비판의 태도를 결여할 뿐 아니라 그것을 멀리한다는 점에서 인문학 혐오의 또 다른, 하지만 훨씬 더 기만적인 판본이다. <지대넓얕>이라는 서점가의 ‘인문’ 베스트셀러는 깊고 느리고 꼼꼼하게 파헤치는 인문적 읽기를 부정하는 방식, 곧 사유를 요점정리로 대체함으로써 인문학을 팔아치운다는 점에서 오늘날 반인문학적 태도의 궁극적 표상이다. 취직, 발전, 경쟁력 구호 속에 담긴 이 ‘얕음’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책과 대학과 사회. 이 긍정의 물결을 비참한 위기로 느끼며 끊임없이 거슬러가는 역설, 그것이 진짜 인문학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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