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 전체가 한 해 동안 바다였다. 대지는 사라졌다. 실종자는 304명뿐이 아니었다. 진짜 실종자는 대지 위에 홀로 군림하는 옷 잘 입은 권력이었다. 애국을 복종으로 치환해 독점해오던 저 거룩한 국가주의였다. 교육과 근로와 병역, 그리고 납세 의무를 잡수시고도 정작 말이 없는 국가였다. 국토를 물에 잠기게 한 건 슬픔과 눈물이었다. 이는 바닷물과 염분 농도가 흡사하다. 그리하여 가슴이 있는 모든 곳에서 국토는 바다가 되었다. 그날 부모는 자식을 잃었고, 국민은 나라를 잃었고, 공동체는 미래를 잃었다. 다만 얻은 것은 늑골 아래 오목한 지점을 떠다니는 항로 잃은 배 한 척, 세월호였다.
4·16, 그 후 내일은 없었다. 어제도 없었다. 오직 그날이 다시 하루로 반복될 뿐이었다. 365일 8760시간 동안 어제와 내일이 다 오늘이었다. 고통은 늘 현재였고 상처는 아물 길이 없었다. 대중이 내쉬는 거대한 한숨은 모여 구름이 되어 광장마다 삭발한 비로 내렸다. 양식 있는 주권자들은 저 물비린내 사이를 허우적거리면서 지상에서 가장 긴 장례를 기꺼이 마다하지 않았다. 더 길어도 좋았다. 그 배를 건져낼 수만 있다면. 세월호는 그저 유족과 희생자의 배가 아니라 벌써부터 나의 배였던 까닭이다. 세월호와 함께 침몰해버린 것들을 회복하지 않고는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으리란 걸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대중은 단지 1000억원짜리 배 한 척을 복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주권자의 요구는 세월호 침몰 앞뒤 전 과정을 거울같이 드러내는 진실의 인양이다. 이를 통해 사회정의를 인양하고자 하는 것이다. 침몰해버린 조국 대한민국을 구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내다버린 죽음을 생명이게 하고자 하는 성스러운 행위이자 바다로 변한 국토를 뭍으로 되돌리기 위한 절박한 생환조건투쟁이다. 한낱 돈 따위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최소의 믿음과 기대가 더는 증발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지금 대중은 고통에 빠져 있는 유족의 안위에만 머물러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코자 할 뿐이다. 인양이라는 말의 참뜻이 이것이다. 그 인양의 동력이 바로 대중 기억이다. 대중의 기억이 곧 역사다.
그 기억과 슬픔을 약탈하고자 하는 세력들은 알아두어야 한다. 권력을 훔치고, 자유에 오라를 던지고, 돈으로 비극을 분식할 수는 있어도 가슴은 앗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의 망실을 강제하고 있는 이자들이 곧 세월호 피로도를 읊조리고 있는 세력이다. 슬퍼할 감정과 권리마저 염증과 혐오로 밀어내는 것은 고통에 대한 공감을 거세시키고자 하는 야만적 폭력일 따름이다. 단언컨대 치열하게 기억하는 것만이 4·16을 치유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경로다. 오직 이 길뿐이다. 온전히 기억해야 그 힘으로 정의는 비로소 몸을 느리게 움직여 전진할 수 있다. 슬픔이 슬퍼하도록 슬픔을 내버려두라. 한 해 넘게 치르고 있는 장기 장례에 흘린 눈물은 진실을 부식시키지 않는 소금으로 작용해왔다. 애오라지 이 눈물이 세월호를 지켜왔다. 언제든 대중이 흘리는 눈물은 시대의 소금이다. 이 슬픔이 물의 시간을 불의 시간으로 바꾸리라.
이 소금을 두려워하는 자 누구인가. 세월호는 날마다 더 깊이 침몰해왔다. 권력은 두 번 세월호를 침몰시켰고, 세금 받아먹고 사는 자들의 집단무능은 세 번째 침몰을, ‘전원 구출’을 송출했던 언론은 망각과 피로도 운운하면서 다시 한 번 집요하게 침몰을 사주하고 있다. 세월호 1년은 이들을 광장으로 끌어내 무릎 꿇리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이 캄캄한 물밑을 헤매고 있는 세월호의 좌표다. 좌표 416, 304와 민심이 교차하는 꼭짓점. 여기가 인양 지점이다.
서해성 소설가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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