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의 ‘신밀월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덩달아 정치권과 언론에서 외교 실패를 질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안팎에서 압박을 받는 박근혜 정부의 외교는 당황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국을 방문해 처음으로 상하원 합동 총회의 연설대에 설 4월말에 정점을 이룰 것이다. 도대체 외교당국이 그동안 무엇을 했길래 과거의 침략 역사를 반성하기는커녕 미화·찬양하는 아베와 같은 사람을 그런 자리에 오르게 했느냐는 비난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점이 어긋난 비판이다. 미-일 두 나라가 벌이는 외교행사에 제3자인 우리가 나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맞지 않는 일일뿐더러, 우리에게 그럴 힘도 없다. 더구나 미-일은 우리나라보다 더 오래되고 훨씬 강고한 동맹이다. 미국 쪽이 미-일 간은 코너스톤(cornerstone)이라고 부르고 한-미 간은 린치핀(linchpin)으로 하는 것을 두고 코너스톤은 4개인데 린치핀은 한 바퀴에 2개뿐이니 우리가 일본보다 더욱 중요한 맹방이라고 주장하는 황당한 사람들도 있으나, 국제사회의 객관적인 눈으로 볼 때 실상이 그와 반대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냉엄한 현실을 인식해야 미국, 한국, 중국, 일본 사이에 작용하는 동북아의 동학을 제대로 보고 대처할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미-소 냉전과 함께 형성된 미-일 밀월체제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소 굴곡은 있었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질적으로 변한 적이 없다. 다만, 처음의 밀월과 지금의 밀월이 다른 게 있다면 미-일 동맹이 견제하려는 대상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미-일 신밀월시대는 강력한 중국의 대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최근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미국 중심의 브레턴우즈체제에 큰 구멍을 내면서 미국을 크게 당혹시켰듯이,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최대 과제는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억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이런 전략에 미리 알아서 발을 맞춰주고 있는 나라가 바로 아베의 일본이다.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함께 끝까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참가를 거부하고 대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으로 중국 포위를 꾀하고 있고, 군사적으로도 집단적 자위권의 해석 변경과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 미사일방어(엠디) 체제 협력을 통해 중국 견제에 발벗고 나서고 있으니 미국으로서는 예뻐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이 계속 힘을 키워가고 미국이 이를 견제하려는 구도가 지속되는 한 미국과 일본의 이런 전략적 이해관계는 강화되면 됐지 약화되진 않을 게 분명하다. 미국과 일본은 여기에 우리나라도 함께 들어와 스크럼을 같이 짤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박근혜 외교는 미-일의 이런 전략적 요구에 전략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역사 문제를 내세운 도덕적 대응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우리 외교가 실패했다고 한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의 실패다. 웬디 셔먼 국무부 차관(2월27일 “민족감정은 여전히 악용될 수 있고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대니얼 러셀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4월6일 “아베 총리의 ‘위안부는 인신매매의 피해자’ 발언은 긍정적 메시지다”)-애슈턴 카터 국방부 장관(4월8일 “한·미·일 협력의 잠재 이익이 과거의 긴장과 현재의 정치보다 중요하다”)으로 이어지는 미국 당국자들의 일본 두둔성 발언은 물샐틈없다는 한-미 간에 전략적 균열이 심상치 않은 수준에 와 있다는 걸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는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실패한 1기 외교전략을 크게 뜯어고쳐야 한다. 역사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 문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주변 나라의 전략적 요구에 전략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구상과 방안을 개발하고 관철해야 한다. 지금은 대통령부터 나서 머리를 싸매고 작동할 수 있는 제2기 외교 전략을 고민해야 할 때다. 이런 판에 마치 가보지 못한 나라들 골라 유람하듯이 중동으로 남미로 날아다니는 대통령을 보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트위터 @ohtak5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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