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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제주 폭낭과 베트남 야유나무 / 고영직

등록 2015-04-03 18:41수정 2015-08-04 01:24

베트남 시인 탄타오는 노래한다. “1848제곱킬로미터 / 270,000 인구 / 30,000명 피살 / 1948년 4월3일”. 2008년 4월4일 제주도를 찾은 탄타오 시인이 제주 진혼굿 무당이 연출하는 해원굿을 보며 쓴 시의 부분이다. 위 대목 바로 다음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돌아가라 돌아가라 / 제주 예수 / 십자가에 못 박힌”.

이에 제주 시인 김수열은 화답한다. 베트남 꽝응아이 외떨어진 바닷가 마을에서 통일전쟁에서 한국군과 맞서 싸우다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사람을 만난 경험을 시로 표현한다. 김수열 시인은 “해거름에 탄타오 시인을 만나 / 그 사람 이름을 묻지 못했다 하니, 시인은 / 그 이름을 ‘꽝아이’라 하자 한다 / 강물은 쉼없이 흐르고 / 별빛 또한 유난히 깊은 밤이었다”라고 시를 끝맺는다. 김수열이 쓴 시는 한국과 베트남 시인이 공동으로 쓴 합작품인 셈이다. 상상력의 국제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제주 작가 38명과 베트남 꽝응아이성 작가 38명이 십년 가까운 내면의 문학교류를 결산하는 차원에서 한국어와 베트남어로 된 공동시집 <낮에도 꿈꾸는 자가 있다>를 제주문학의집에서 출간했다. 1948년 4·3의 슬픈 기억을 간직한 제주 작가와 전쟁의 참화를 겪은 베트남 꽝응아이성 작가들의 만남은 각별했다. 베트남 작가들은 아름다운 땅 제주도와 제주 사람들이 겪은 국가폭력의 상처에 대해 이해했고, 제주 작가들은 한국군의 피와 야만이 스며 있는 베트남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시적 정의(Poetic Justice)를 구현하는 기회가 되었다. 제주와 꽝응아이 모두 한국과 베트남에서 서울과 하노이(또는 호찌민) 같은 ‘주류’적 질서로부터 떨어진 변방 지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

제주와 꽝응아이 작가들은 4·3과 전쟁에서 죽은 원혼들을 위무하며 ‘원통한 죽음’을 기억하고자 한다. 원통한 죽음은 애도가 결여된 죽음이다. 애도가 결여된 죽음은 사색과 기억, 행동과 의례를 통한 치유와 회복의 사회·문화적 과정을 지연시킨다. 인류학자 권헌익은 1968년 베트남 하미 마을과 밀라이 마을에서의 학살 문제를 다룬 <학살, 그 이후>(2012)에서 베트남의 전쟁 기념의 경우 “국가 독점에서 민간과 공동체 부문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미와 밀라이는 각각 한국군(1968.2.22)과 미군(1968.3.16)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진 곳이다. 1968년 2월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서 일어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를 다룬 고경태의 <1968년 2월 12일>도 최근 출간되었다. 구수정, 김현아 같은 활동가들은 베트남전의 실상을 알리는 작업을 지금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제주 시인 배진성의 <폭낭과 야유나무>는 상상력의 국제연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1949년 1월17일 제주 북촌리 폭낭(팽나무)과 1968년 2월12일 베트남 퐁니 마을의 야유나무를 연결해 시적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시인은 말한다. “탐라국 폭낭들이 보았고 / 참파왕국 야유나무가 보았다”라고. 어쩌면 이것이 문학과 예술이 할 수 있는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에의 책임이 아닐까. 오는 4월30일 종전 40년을 맞아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 2명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게 된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원통한 죽음을 잊을 권리는 없다. 우리 신체 중에서 가장 연약한 부위가 ‘귀’라고 한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모든 죽음은 애도와 위로를 받을 절대적 권리가 있다는 말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가장 존중되어야 하지만, 철저히 묵살당하는 시절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아니한가. 죽어서도 위로받지 못하는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을 기억하자. 산 자의 ‘넋두리’를 들어줄 줄 아는 작가적 가슴이 요청되는 잔혹한 사월이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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