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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리퍼트’에서 ‘세월호’를 읽다

등록 2015-03-11 19:03수정 2015-03-12 00:22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병문안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진 뒤, 주변에서는 그 적절성을 놓고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안이 아무리 중대하다지만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병원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것은 ‘과공’이 아니냐는 지적에서부터, 만약 주미 한국대사가 피습을 당했다면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병문안을 오겠느냐는 등 회의적인 의견도 적지 않았다. 나름 일리가 있는 말들이지만, 그렇다고 쌍심지를 돋우며 비판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병문안 장면을 전하는 신문기사를 읽다 보니 문득 씁쓸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묘하게도 이날의 ‘위로 장면’이 박 대통령의 세월호 유족 접견 광경과 겹쳐서 다가온 탓이다. 두 만남의 주제는 ‘위로 격려 사과’로 똑같았지만 그 빛깔과 질감, 온도는 차이가 있어 보였다. 리퍼트 대사와의 만남에서는 어떤 머뭇거림이나 껄끄러움,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식’이라는 공통분모가 없던 유족들과의 만남과는 달리 ‘면도칼 피습’이라는 동병상련의 공통분모까지 있어 대화는 더욱 윤기가 흘렀다. 한 번의 마지못한 공식 접견을 끝으로 유족들한테 냉정하게 등을 돌린 대통령의 모습이 어른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의 병문안 결정에 찬성하면서도 이날 만남이 씁쓸하게 다가온 첫째 이유다.

대통령이 몸소 주한 외국 대사의 입원 병실을 찾은 것은 의전상 ‘파격’이라고 한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대외 행보라는 게 하나하나 깊은 전략적 숙고의 결과물인 것을 생각하면, 대통령의 파격에는 뭔가 깊은 뜻이 담겨 있어야 옳다. 예를 들어 ‘대통령인 내가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직접 병문안을 했으니 이것으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사과 표시는 충분히 했다. 이번 사건에 주눅 들지 말고 미국과의 관계에서 당당히 대처하라’는 메시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요즘 정부 여당이 하는 모습을 보면 대통령의 행보가 이런 전략적 사고의 산물인지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사실, 대통령의 바깥 행보는 철저히 전략적이어야 하는 반면 안으로 국민을 보듬는 일은 전략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수록 좋다. 그런데 우리 대통령은 바뀐 것 같다. 유족들과의 만남에서는 파격은 고사하고 정치적 유불리의 주판알 튕기기에 바빴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대통령의 병문안은 더욱 씁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이후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부쩍 많이 나온다. 한-미 동맹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도 심각한 의문이 든다. 그동안 땅이 물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견제를 위해 미국이 한국에 양자택일적 요구를 해온 것이나, 웬디 셔먼 미국 국무차관의 과거사 발언 등과 같이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 아니었던가.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단지 외교적 수사 차원이라면 몰라도 피습 사건의 여파로 우리의 이익이나 자존심을 내팽개치는 것을 뜻한다면 정말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눈을 내부로 돌려보면 정작 땅이 굳어져야 할 우리 사회는 온통 진흙탕이 되고 있다. 비가 온 김에 도랑도 치고(진보세력에 대한 탄압), 가재도 잡으려는(정치적 국면전환) 여권의 전략 때문에 곳곳에는 흙탕물이 흘러넘치고 취약한 국가적 지반은 더욱 흔들리고 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책임 회피를 위한 수세적 태도가 분열과 갈등의 씨앗이었다면,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에서는 정치적 목적의 공세적 종북몰이가 나라를 갈기갈기 찢고 있는 셈이다.

박 대통령에게 충심으로 당부한다. 리퍼트 대사를 찾아간 마음의 10분의 1이라도 할애해 세월호 유족들에게 다시 따뜻한 손길을 내밀기 바란다. 리퍼트 대사가 면도칼로 턱밑을 베였다면 그들은 가슴이 통째로 오려진 사람들이다. 대통령한테 세월호 유족들을 다시금 생각하라는 것은 단지 리퍼트 대사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다시금 성찰하라는 뜻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세월호 문제 어떻게 됐느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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