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일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라는 단체의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특강을 했는데 메시지에 울림이 담겼다. 그는 3·1운동을 3·1혁명으로 이름을 바꾸자고 주장했다. 제헌절, 광복절, 한글날, 개천절은 이름이 확연한 의미를 지니는 반면에 왜 3·1절만 의미가 거세되어 단순한 숫자로만 표현되느냐는 것이다. 1919년 3~4월에 일어난 세계사적으로 위대한 혁명적 거사를 ‘3.1운동=스리 콤마 원 스포츠’로, 외국인이나 어린이가 오인하도록 만들 이유가 없다는 문제제기였다.
3·1혁명은 중국 신해혁명, 러시아혁명과 함께 유라시아의 3대 혁명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무엇보다 기본가치로 볼 때 체제를 완전히 변혁하고자 했다. 첫째로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일제 식민지배를 거부하였으며, 둘째로 4000년 동안 내려온 봉건왕조를 거부하고 민주공화주의를 주창했다. 셋째, 여성이 역사 현장에 주체적으로 등장하여 신분, 세대를 넘는 범민족적 항쟁을 벌였다. 당시 피검자 1만9525명 중 학생과 교원이 2355명인데, 이 가운데 여성이 218명이었다. 여성의 취학률이 남성의 100분의 1도 안 될 때이니 대단한 숫자다. 넷째, 전근대적 신민의식이 근대적 시민의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3·1혁명은 역사의 여러 흐름이 유입되었다가, 새로운 흐름을 발생시키는 발원지이며, 거대한 호수로 비유되기도 한다. 실제로 동학혁명, 갑오개혁, 만민공동회, 의병전쟁, 의열투쟁 등의 흐름이 3·1혁명으로 만나, 무장투쟁, 임시정부, 조선의용대, 광복군 등의 독립전쟁 흐름을 만들어냈다. 대한민국의 정체가 된 민주공화주의는 3·1혁명에서 발아했다.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3·1혁명이라 불렀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1941년 조소앙이 기초한 건국강령 제정 이후 3·1혁명 또는 3·1대혁명을 공식 호칭으로 썼다. 중국 역사가와 언론매체들도 모두 혁명이라 하였다. 다만, 일본 언론이 소요, 폭동 따위로 불온시하다 간혹 ‘운동’이란 말을 썼다고 한다.
혁명이 운동으로 공식 격하된 것은 엉뚱하게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다. 당시 헌법기초위원회는 전문위원 유진오가 마련한 초안을 중심으로 논의했다. 초안은 전문에서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했고 30명의 헌법기초위원이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한민당 계열 일부 의원들이 혁명이란 용어에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5인 소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고, 친일파 출신 이종린 등이 주도한 소위가 3·1혁명을 기미 3·1운동으로 고친 수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제헌국회 실세이던 이승만은 “혁명이라면 우리나라를 전복하자는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엉뚱한 발언을 하고, 일본 제국대학 출신 이주형 의원의 찬성 발언만을 허용한 다음 표결에 부쳤다. 친일세력과 역사의식이 박약한 이승만의 농간으로 3·1혁명이 박제화된 것이다.
앞으로 3·1운동을 3·1혁명으로 공식 수정하면 좋겠다. 무엇보다 사물의 실체와 이름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공자는 정명사상을 주장했다. 아울러 식민지 근대화론, 뉴라이트 인사들의 건국절 지정론 따위의 그릇된 역사관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승만은 3·1혁명을 격하시킨 것을 봐도 건국의 아버지로 높임을 받을 자격이 없다.
일본 아베 정권이 전쟁 책임을 부인하고, 그 행태를 미국이 은근히 두둔하고 있다(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 재균형이라는 이름 아래 중국 포위망을 짜려는 미국과 신형 대국관계를 추구하는 중국이 맞서 동아시아에 갈등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다. 올바른 역사인식은 갈등 대신 균형과 평화의 질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출발점이다. 3·1혁명 이름 되찾기는 동아시아 차원의 의미도 크다.
박창식 논설위원 cspcsp@hani.co.kr
박창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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