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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나는 샤를리다!”의 빈자리 / 홍세화

등록 2015-01-29 18:45

이슬람근본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의 수혜자들과 적대적 공생관계가 아닐까. 샤를리 에브도는 과거의 좌파 언론조차 오늘날 이 적대성을 물적 토대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 물결이었지만 텅 비어 있는 듯했다. 그것은 좌파의 자리였다.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지난 1월 초 프랑스 파리에서 이틀 사이를 두고 샤를리 에브도 잡지사와 유대인 식료품 가게를 겨냥한 테러행위가 일어났고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세 명의 이슬람근본주의 테러리스트에 의해 저질러진 야만적인 행위에 맞서 프랑스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경악, 분노, 비탄의 목소리가 나왔고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가 각종 미디어와 에스엔에스(SNS) 등을 통해 퍼져나갔다. 1월11일에는 파리에서만 백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레퓌블리크(공화국) 광장에 운집하여 테러 반대와 톨레랑스를 외쳤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하여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등이 양팔을 껴안고 파리 대로를 200미터가량 행진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에 서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군중 앞에서 “나는 베를린인이다!”라고 선언하여 환호를 받았던 일과 2001년 9월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가 일어났을 때 르몽드 신문이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던 일을 떠올릴 수 있다. 과문의 탓인지 나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대량살상무기를 핑계로 이라크를 침략했을 때나 그로 인해 어린이들을 비롯하여 수십만의 무고한 이라크인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 “우리는 이라크인이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는 서방의 - 진보를 표방하는 매체를 포함하여 - 언론에 관해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샤를리다!”라고 외친 수많은 사람들 중 샤를리 에브도의 독자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다수는 샤를리 에브도가 지난 10여년 동안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대해 어떤 풍자 만평을 게재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샤를리다!”라고 외치고 나선 것이다. 그만큼 테러에 대한 반대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테러에 반대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 테러의 희생자와 같아지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샤를리다!”의 물결은 샤를리가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언론매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점은 “펜은 총칼보다 강하다!”라는 다른 구호에서 확인되는데 나 같은 관찰자에게 다가오는 물음은 샤를리 에브도가 ‘펜’이었다면 ‘어떤’ 펜인가에 있다. 가령 샤를리 에브도에 대해 이스라엘 출신 영국 지식인 길라드 아츠몬은 “시온주의 전쟁을 지지한 네오콘, 친유대 잡지로서 소수자와 특히 이슬람을 타자화하는 데 헌신해왔고 그동안 유대인들의 권력이나 미국이라는 전쟁 기계에 대한 비판에는 침묵해왔다”고 지적한다. 그는 심지어 샤를리 에브도를 가리켜 “파리에 파견된 이스라엘의 문화담당관처럼 행동해왔다”고, 프랑스 지식인들이 감히 꺼내지 못할 말을 거침없이 꺼냈다. 실제로 프랑스 지식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관해 침묵하고 있는데, 그의 말을 다시 빌려 말하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대신 말하기 전에 생각하라고 가르치는” ‘정치적 올바름’이 강제하는 ‘자기 검열’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슐로모 산드는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수류탄을 터번처럼 두른 무함마드 풍자화에 대해 “이슬람을 테러와 동일시한 것은 유다이즘을 돈과 동일시한 것과 같다”고 지적하면서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공격했다는 주장을 일축했는데, 설령 똑같이 공격했다고 해도 공격을 받는 처지가 약자인가 강자인가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는 1886년에 프랑스에서 <유대인의 프랑스>라는 책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2014년에는 <굴복, 이슬람의 프랑스>라는 책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면서 언론의 뜨거운 반응을 받은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굴복, 이슬람의 프랑스>의 저자 미셸 우엘베크는 21세기 초에 유대교의 위협을 선동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이슬람의 위협을 떠올리게 하는 책은 팔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강자의 폭력은 구조적이며 일상적이어서 인식하기 어려운 데 반해 약자의 폭력은 삽화적이며 선정적으로 드러난다. 또 기울어진 역학관계에서 양비론은 강자에 대한 지지와 같다. 올바른 ‘펜’이라면 독자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파도만 보도록 하지 않고 그 파도를 일으키는 구조를 파악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언론매체라는 허울을 가지고 있으면서 타자에 대한 증오와 혐오, 타자의 위협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면서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미디어에 관해 분단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은 본디 ‘진실과 공익의 추구’라는 말과 결합될 때에만 유효한 것인데, 북한이라는 타자와 관련된 혐오, 증오, 위협의 선정적 보도는 검증의 어려움이 있어서 더욱 제어되지 않는다.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의 저자 파스칼 보니파스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으로 ‘전문가에게 맡기기’와 ‘단순화하기’를 들었는데, 특히 단순화하기는 사이비 언론의 선정성과 만나면서 우리로 하여금 섬세한 안목을 갖게 하는 대신 ‘선과 악’, ‘흑과 백’의 이분법적 사고 틀에 갇히게 할 위험이 크다. 이 점은 최근 신은미, 황선씨의 북한 방문 이야기를 ‘종북 콘서트’로 규정하면서 신씨가 하지도 않은 말을 자극적으로 뱉어낸 종편을 통해서 저급한 형태로 증명된다.

샤를리 에브도를 한국의 사이비 언론과 동열에 놓으면 어느 쪽에서 더 반발할지 모르겠는데, ‘반권위’의 기치를 내걸었고 좌파의 시각까지 보였던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일탈에 빠진 것을 다만 유대인의 모략이나 상업주의로 설명할 수 있을까?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보편 이성과 거대담론에 맞선 포스트모더니즘에도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는 좌파의 전선을 약화시킨 몫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샤를리 에브도가 그렇게 흘러갔듯이 수많은 좌파 언론들이 우경화했고 또 수많은 좌파 정치인들이 허울만 좌파로 남았다.

나토(NATO)의 이라크 폭격을 승인한 유럽의 정치적 수장들과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자들이 이번 파리 시위에서 나란히 앞장섰다는 점은 실로 시사적이다.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말은 두 적대세력이 서로를 공격하면서 서로를 강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 남북한 정권 사이가 그러한데 정권을 유지, 강화하는 데 있어서 민중이든 인민이든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게 훨씬 쉬운데다 작은 기득권조차 내려놓지 않아도 되는 이점까지 따른다. 오늘날 테러 행위를 주도한다고 지목되는 이슬람근본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의 수혜자들과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샤를리 에브도는 과거의 좌파 언론조차도 오늘날엔 이 적대성을 물적 토대로 삼고 있다는 예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 물결이었지만 텅 비어 있는 듯했다. 그것은 좌파의 자리였다. 위에 언급한 슐로모 산드는 스스로 ‘샤를리(Charlie)’가 아니라 ‘찰리(Charlie)’라면서 일생 동안 희극배우로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난한 사람과 배제된 사람을 조롱하지 않았던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게 했다. 찰리 채플린처럼 어린 시절을 빈민구호소에서 보내야만 좌파로 사는 것은 아닐진대 그런 인물들이 소멸되어 가는 중인가.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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