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를 출입하던 2001년 무렵이었다. 대통령의 세 아들을 지칭하는 이른바 ‘홍삼 게이트’를 비롯해 권력형 스캔들이 잇따라 터지면서 김대중 대통령 인기는 곤두박질쳤다. 아침에 광화문에서 택시를 타고 청와대 춘추관까지 가자고 하면, 택시기사는 나를 한번 쓰윽 훑어보곤 “청와대 근무해요? 거 좀 잘하라고 하세요”라고 시니컬하게 말하곤 했다. “난 그냥 기자인데요”라고 대답하기도 뭐하고 택시기사들의 지청구를 듣기도 싫어, 바쁜 출근시간에 20분 넘게 걸어서 청와대까지 간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 무렵의 김대중 대통령 지지율을 다시 찾아보니 27~29% 정도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과 같다. 차이가 있다면, 김 대통령이 임기 4년차였다면 박 대통령은 임기 3년차에 30% 벽을 깨고 추락했다는 점이다. 이런 추세라면 지지율은 더 떨어질 것이다. 임기 중반에 이미 여론과 등을 돌리는 대통령을 보면서, 야당은 반전의 기회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대통령 지지율의 추락이 야당의 도약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대통령 지지율의 추락이 야당 지지자들에게 ‘거봐라’ 하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수 있을진 모르지만, 선거 승리를 담보하진 않는다. 역대 대통령 지지율과 대선 결과 사이의 상관관계는 냉정하다. 김영삼 이후 모든 대통령의 집권 5년차 지지율은 30%를 밑돌았지만, 그해 대선에서 정권이 바뀐 경우는 딱 절반이다. 지금 박 대통령 지지율이 최악이라고 하지만 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임기 1년차에 21~22%까지 지지율이 떨어진 적이 있다. 인기 없는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만으로 야당이 재집권하긴 매우 불투명하다는 얘기다.
야당은 훨씬 절박하게 달려들어야 한다. 전당대회에 나선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후보들은 모든 것을 내던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야당의 위기’를 말하면서도 대책은 평시처럼 내놓으니 감동이 없다. 정부 여당의 잇단 실책에도 전당대회 열기가 살아나지 않는 건 후보들이 변화에 대한 믿음을 주지 못하는 탓이 크다. 지금 새정치연합 후보들에게 필요한 건 정권교체를 위해 내가 무엇을 버릴 수 있는지를 국민에게 보여주는 일이다.
문재인 후보는 누가 뭐래도 국민 기대가 가장 높은 차기 대선 주자다. 그런데도 예상보다 힘든 경선을 치르는 건 2012년 총선·대선의 실패를 반복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2012년처럼 ‘친노’가 다시 총선 공천권을 틀어쥘 것이란 우려는 당 밖보다 당 안에서 훨씬 크다. 이건 ‘공천권을 내려놓겠다’, ‘부산에서 출마하지 않겠다’는 말로는 잠재울 수 없다. 훨씬 더 큰 희생과 위험을 감수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문 후보는 2017년 대선이 아니라 내년 4월 총선에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말해야 한다. 총선 승리를 이끌지 못하면 대선 후보를 포기하겠다고 해야, 야당 지지자들은 문 후보가 말하는 변화의 진정성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지원 후보와 이인영 후보 역시 내년 총선에서 무엇을 버릴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가령, 박지원 후보는 스스로 말했듯이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 원내대표 등을 두루 지낸 야당 원로 중 한 사람이다. ‘내가 당대표가 되면 다른 원로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 진정한 세대교체를 이뤄내겠다’는 믿음을 지지자들에게 심어줘야 한다.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걸 버릴 때, 국민은 그 빈자리를 믿음으로 채워준다. 박근혜 대통령이 비서 3인방을 버리지 않는 한 국민 지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 새정치연합 당대표 후보들은 무엇을 버릴 수 있을까. 한번 지켜보자.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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