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공소장이 최근 공개되었다. 사건 당시의 대화 상황을 간추리면 이렇다.
-여승무원, (견과류 봉지를 열지 않은 채 보여주면서) “견과류도 드시겠는지요?”
-조, “(봉지도 까지 않고) 이런 식으로 서비스하는 게 맞냐?”
-여승무원, “매뉴얼에 맞게 서빙한 것입니다.”
-조, “서비스 매뉴얼을 가져와라.”
(박창진 사무장이 서비스 매뉴얼이 저장된 태블릿피시를 조에게 전달)
-조, “내가 언제 태블릿피시를 가져오랬어, 갤리인포(기내 간이주방에 비치된 서비스 매뉴얼)를 가져오란 말이야.”
-조, “아까 서비스했던 그×, 나오라고 해. 내리라고 해.”
-조, (태블릿피시를 읽은 다음 최초 승무원의 설명이 맞다는 것을 알고 나서) “사무장 그 ×× 오라 그래.” “이거 매뉴얼 맞잖아. 니가 나한테 처음부터 제대로 대답 못해서 저 여승무원만 혼냈잖아. 다 당신 잘못이야. 그러니 책임은 당신이네. 너가 내려.”
승무원의 서비스를 문제 삼아 욕설을 퍼붓고 무릎을 꿇리며 비행기에서 내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행태는 직원을 종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갑질 중의 갑질’이다.
그런 인식을 전제로 하되, 여기서는 대화의 구조를 분석해보자. 조씨는 처음에 서비스 형식을 문제 삼다가 매뉴얼을 읽고 승무원의 서비스가 매뉴얼대로 한 것이며 자신이 잘못 안 것임을 알게 된다. 이 대목에서 멈췄으면, 즉 최초의 화제인 서비스의 옳고 그름에 집중하였다면 문제가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씨는 “니가 나한테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게 문제”라며 엉뚱하게 사무장의 태도로 대화의 초점을 휙 바꿔버린다.
대화는 어떤 결론을 만들기 위해 상대와 함께 논의하고 협력하는 과정이다. 대화는 질적, 양적으로 적당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이어가야 하고, 무엇보다 ‘관련성 있는’ 대화를 해야 한다.(언어철학자 그라이스가 제시한 ‘대화의 격률’) 대화 도중에 이견이 생겼다고 화제를 일방적으로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꼭 화제를 바꿔야 한다면 “우리는 이 점에서 생각이 다르군요. 일단 여기까지 논의하고요”라며 상황을 정리해두는 게 좋다. 그래야 상대방이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논쟁을 벌이다 “당신 몇 살 먹었어?”라며 논제를 휙 바꾸곤 한다. 그것도 바람직하지 않건만, 조씨처럼 대화 상황이 불리하다고 대화의 초점을 휙 바꾸면서 권력관계 하위인 상대방을 찍어누르는 것은, 언어 갑질의 표본이며 인간에 대한 폭력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을 잘못하여, 지지율이 30%대로 뚝 떨어졌다. 회견 상황을 ‘대화의 격률’에 비춰 분석해보면, 박 대통령도 ‘관련성 있는 대화’를 하지 않고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가령 청와대의 측근 비서관들(문고리 권력 3인방)한테 둘러싸여 장관이나 다른 참모들한테 대면 보고를 받지 않아서, 소통의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질문을 받고, 박 대통령은 “이번에 철저하게 조사했는데 비서들은 아무런 비리가 없더라”고 답한다. 소통 문제를 질문받고 비리가 없다고 하는 것을 대화라고 할 수 있나. 상대방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역시 갑질 언어 아니겠는가.
조 전 부사장은 재벌 총수의 장녀로, 박 대통령은 ‘유신 공주’ 시절에 각각 제왕적 문화에 젖어 지낸 까닭에 언어 습관이 나빠졌으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수평적 대화 훈련이 부족한 게 과연 이들뿐이겠는가. 우리 자신의 대화 습관에 알게 모르게 갑질이 녹아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도 함께 성찰하는 게 좋겠다.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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