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논설위원실장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온다.’ 이성부 시인이 노래한 <봄>처럼, 을미년 새해도 그렇게 어김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새해는 왔어도 이 시가 담고 있는 것과 같은 설렘과 떨림, 희망과 낙관은 전혀 느낄 수 없다. 해는 바뀌었지만 새해 벽두부터 나라 안팎이 스산하다. 비관과 실망의 연속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방과 러시아의 대결, 중동의 질서를 흔들고 있는 이슬람 과격파 단체 ‘이슬람국가’의 준동, 중국의 급부상에 따른 동아시아의 긴장은 더 커졌으면 커졌지 잦아들 기미가 없다. 7일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샤를리 에브도’ 언론인 테러 사건은 이런 불안정한 세계정세가 낳을 비극의 서막일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도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유가의 급락과 유럽의 디플레이션 조짐이 겹치면서 2008년, 2011년에 이은 제3의 세계 경제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어두운 전망이 나온다.
나라 안의 사정은 어떤가. 지난해의 양대 참사인 세월호 침몰과 통합진보당 해산이 남긴 상처에선 아직도 피와 신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 정치의 무능과 무책임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교·안보의 핵심 사안인 남북문제에선 서로 제의와 역제의의 신경전만 난무할 뿐, 남북 모두 소통로든 대통로든 길을 뚫으려는 의지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북한처럼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던 쿠바와 이란이 속도감 있게 관계 개선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씁쓸하기 그지없다. 일본군 군대위안부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 문제도 남 탓을 하기에 앞서 우리 외교의 잘못은 없었는지 점검해볼 때가 됐다.
사회·경제적으로 빈부격차 해소와 젊은이들의 취업이 최대의 화두로 등장한 지 오래되었건만, 기대했던 ‘초이노믹스’는 집값 올리기를 필두로 한 가진 자 위주의 정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한편에선 ‘창조 없는 창조경제’의 목소리만 몇 년째 요란하다. 여기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에프(F) 학점’으로 응답하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게다가 나라의 중심을 잡고 정책을 이끌어가야 할 청와대에선 민생과 전혀 상관없는, 그들만의 권력투쟁극을 담은 공문서가 유출되어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더니 급기야 민정수석의 항명 사태까지 발생했다. 공직기강을 바로잡는 것을 주업무로 하는 관리의 항명은 곧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 징표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그런 심각성을 인식하고 분위기를 쇄신해 재출발을 하려고 하기는커녕 어깃장을 부리고 있다. ‘나라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나라를 걱정해야 할 판’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들어맞는 때도 없을 것이다.
세상이 갈피를 못 잡고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는 데는 세계 질서를 규율하는 기준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는 데 더해, 우리가 이런 변화를 인지하지도 쫓아가지도 적절하게 대응하지도 못하고 있는 탓이 크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외교 담당 논설위원인 기디언 래크먼은 최근 ‘서구는 지적인 자신감을 잃었다’는 제목의 칼럼(1월6일치)에서 냉전 종식 이후를 주도했던 ‘시장, 민주주의, 미국의 힘’이라는 세 가지 가치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세계 불안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지금이 바로 탈냉전 이후 다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과도기라는 것이다. 적실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두 차례의 세계 경제 위기로 시장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고, 민주주의와 미국의 힘도 중동과 동구, 중국 등 세계 곳곳에서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서구에서 유행하는 뉴노멀(New Nomal)이나 시진핑 중국 주석이 말하는 신창타이(新常態)도 같은 문제의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강대국들이 두는 바둑판의 흐름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더 이상 머뭇거릴 틈이 없다. 그들이 한 발 뗄 때 두 발 내디뎌야 겨우 발을 맞출 상황이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지금은 민족시인 이육사가 <절정>에서 보여준 절박하고 처절한 문제의식이 요구되는 때다. 대통령과 정부, 여야 정치권이 제 노릇을 하지 못하면 깨어 있는 시민이 나설 수밖에 없다.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트위터 @ohta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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