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는 딴 데서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열쇠를 찾고 있는 이야기 속 사내의 행동은 물론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술 취한 사내와 얼마나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가?
민주정치의 소생을 위한 근본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집권을 영구적으로 보장하는 지금 선거제도의 폐기 혹은 수정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민주정치의 소생을 위한 근본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집권을 영구적으로 보장하는 지금 선거제도의 폐기 혹은 수정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모르지만, 서양사회에서 꽤 널리 알려져 있는 우스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날 밤 경찰관이 거리를 순찰하다가 보니 술에 취한 한 남자가 가로등 불빛 밑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다가가서 뭘 하느냐고 묻자 잃어버린 열쇠를 찾는 중이라는 대답이었다. 경찰관은 그를 돕고자 자신도 열심히 찾아봤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쇠를 잃어버린 장소가 여기가 확실히 맞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아니요, 저쪽에서 잃어버렸어요”라며 좀 떨어진 어두운 곳을 가리켰다. 기가 막힌 경찰관이 “아니, 잃어버린 데서 열쇠를 찾아야지 여기서 찾고 있으면 어떡해요?”라고 힐난하자 그 남자는 대답했다. “저긴 어둡잖아요. 이쪽은 밝아서 잘 보이니까요.”
오래전에 어디선가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이야기를 그냥 유쾌한 유머로 이해하며 웃고 넘겼다. 그러다가 최근에 어쩌다가 이 이야기가 기억났고, 이것은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쇠는 딴 데서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열쇠를 찾고 있는 이야기 속 사내의 행동은 물론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술 취한 사내와 얼마나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가? 한번 곰곰이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나 자신만 해도 그렇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몇십년간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한번도 글을 쓰고 난 뒤에 개운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사태의 정곡을 찌르지 못했다는 느낌, 미진하다는 느낌이 늘 수반되었다. 그런 결핍감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쓰지만, 번번이 결과는 마찬가지다. 물론 내 천박한 지식과 모자라는 글재주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정확한 이유는, 문제의 본질에 맞부딪치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노력 대신에 그저 상투적인 사고와 언어에 의지해서 안주해 버리는 습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비유컨대, 나는 성냥이든 라이터든 불을 밝혀 열쇠를 찾으려고 하지는 않고 가로등 불빛 밑에서 열쇠를 찾는 어리석은 사내와 별로 다르지 않게, 초점이 어긋난 글을 글이랍시고 써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어쭙잖은 글이야 그렇다 치고, 사회현실 혹은 정치적 현실로 옮겨가면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된다.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내가 보기에 오늘날 이 나라(그리고 이 세계)가 처한 근본적 위기상황은 무엇보다 이른바 권력 엘리트들이 저 이야기 속의 술 취한 사내와 본질적으로 하등 다를 게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지금 그들은 불이 난 집에 불을 끄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오히려 부채질을 하면서 그것을 ‘정치’ 혹은 ‘국가운영’이라고 부르고 있다. 요컨대 완전히 미친 짓을 정치랍시고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한심한 것은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하는 ‘정치지도자’들의 자세이다.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산업시스템이 이대로 간다면 조만간 지구가 ‘거주 불가능한’ 장소가 된다는 것은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해당 과학자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느냐 하면, 가령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 제임스 러블록은 세계의 정치가 급진적인 변화 없이 이대로 간다면 21세기 끝 무렵에는 지구상에 생존해 있을 인간은 현재의 1할도 안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시급히 세계적인 ‘현인회의’를 구성하여, 말하자면 독재체제를 수립하자는 극단적인 제안을 내놓고 있다. 물론 현실성 없는 제안이지만, 사태가 심히 급박하다는 말일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세계의 정치가, 권력자들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책임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님이 분명하다. 최근 들어 기후변화 관련 국제회의가 뻔질나게 열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회의들의 결론은 늘 같다. 즉, 다음번에 또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정치가들의 이런 극단적으로 무책임한 자세의 원인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오늘의 정치가 기업의 이해관계(그것도 매우 단기적인 이해관계)에 매달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지금 권력자들은 극소수 자본가, 대주주들의 끝 모를 탐욕을 위해 만인의 공유자산을 사유화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삶터와 생계수단까지 가차없이 박탈하는 것을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세상은 온통 힘없고 가난하고 억울한 자들의 한숨과 눈물, 탄식과 신음 소리로 가득 차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여전히 많은 지식인, 학자, 언론인들은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정치가들의 ‘책임’을 묻는 민주정치가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공정한 선거라는 게 과연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리 잘 관리된 선거일지라도 선거는 기득권세력 혹은 기득권세력의 비호를 받는 자들이 아니면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한 정치놀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선거란 기득권세력의 영구집권을 위한 메커니즘에 불과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진정한 민주정치의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확실히, 지금과 같은 선거에 의한 대의제 민주주의 시스템으로는 그런 가능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 일부에서 꽤 설득력을 얻고 있는 ‘비례대표제 확대’라는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더라도 부분적인 개선은 있겠지만 근본적인 사태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물론 부분적인 개선도 중요하다. 따라서 비례대표제 확대는 당면한 정치개혁의 과제로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민주정치의 소생을 위한 근본적인 개혁은 역시 기득권세력의 집권을 영구적으로 보장하는 선거제도의 전면적 폐기 혹은 부분적인 수정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기존의 국회 대신에 혹은 기존 국회와 나란히 별도의 ‘시민의회’를 구성하는 방법을 대안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국가의 중대사에 관한 최종적인 의사결정은 반드시 ‘시민의회’의 동의를 거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민의회’의 멤버들은 능동적인 시민들 중에서 무작위 제비뽑기를 통해서 선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기득권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면 투표가 아니라 제비뽑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제비뽑기로 공직자를 뽑아야 한다는 생각은 고대 아테네, 로마공화국,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의 보편적인 상식이었다. 일찍이 마키아벨리, 루소, 몽테스키외 등 제1급의 공화주의 내지 민주주의 사상가들이 공통하게 제비뽑기를 지지한 것도 그것이 민주정치의 불가결한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선거제도의 발본적인 개혁을 통한 이러한 민주정치의 실현은 ‘민중권력’의 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실 지금처럼 이 나라의 통치세력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갈수록 무너뜨리고 있는 것도, 사회적 약자들이 끝없는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도 따져보면 민중권력이 현저히 약해진 탓이다. 그러므로 긴급한 문제는 이윤 논리, 경쟁주의 논리가 압도하는 풍토에서 뿔뿔이 흩어진 개인들을 여하히 결집하여 ‘조직화된 민중권력’을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민중권력의 강화를 위해서는 ‘제비뽑기에 의한 시민의회’라는 아이디어를 사회 전체의 새로운 상식이 되도록 우리가 치열하게 싸우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주권재민을 천명한 헌법 정신에 매우 충실한 싸움일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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