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논설위원실장
원로 언론인 남재희씨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대해 “놀라고, 또 놀랐다”고 아주 짧게 소감을 밝혔다. 두 번 놀랐다는 얘기인데, 한 번은 헌재가 해산 결정을 한 것에 놀랐고, 또 한 번은 헌재 재판관 9명 가운데 8명이나 해산 결정에 손을 들어준 편파적 쏠림에 경악했다는 것이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우후죽순처럼 터져나온 혁신계열 정당을 담당했던 <민국일보> 정치부 초년 기자 시절부터 한국의 진보 정치판을 지근거리에서 애정을 갖고 60년 이상 관찰해온 그의 소회인지라 몇 글자 안 되는 평이지만 천근의 무게로 다가온다.
반면, 남씨의 서울법대 후배로 한때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그와 한솥밥을 먹었던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헌재의 결정을 ‘고무·찬양’하면서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고문도 도청도 추방도 용인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버젓이 칼럼으로 내보냈다.(12월23일치, ‘헌재 결정이 울려주는 경각심’) 자신의 이념 성향에 맞는 결정에 흥분한 나머지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인류가 악전고투해서 쌓아올린 보편가치를 일거에 부정하는 그런 난폭한 주장을 어찌 그렇게도 당당하게 할 수 있는지 그 용기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득권에 사로잡혀 있는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들을 향해 ‘영적 치매’에 걸린 사람들이라고 나무라서 화제가 되고 있지만, 김 고문과 같은 분들이야말로 ‘심적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작 내가 가장 놀라워하는 대목은, 단지 자기들 생각에 북한과 노선이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대의민주주의의 기둥인 한 정당을 마치 암세포 도려내듯이 해산시킨 헌재의 우악스러운 칼질도, 그 결정에 환호작약하는 맹목적 응원단도 아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평가와 시각이다.
박 대통령은 헌재 결정 다음날인 12월20일 윤두현 홍보수석을 통해 “이번 헌재 결정은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운을 떼더니, 23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한발 더 나아간 평가를 내놨다. 앞의 발언에 “우리 국민들이 이번 헌법재판소의 역사적 결정을 자유민주주의를 더욱 확고히 해서 통일시대를 열어나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대목을 추가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연이은 발언에서 통합진보당 해산에 그의 의중이 짙게 반영됐을 것이라는 단서를 어렴풋이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더욱 중대한 사실은 이를 통해 그동안 속에 감추고 있던 대결적 대북관을 서슴없이 드러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의 헌재 발언 이전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드레스덴선언을 발표한 장소의 상징성과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의 ‘2015년 통일 완수’ 발언 등을 통해 박 정부의 통일정책이 흡수통일론에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추찰해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헌재의 역사적 결정’ → ‘자유민주주의 확고화’ → ‘통일시대’로 이어지는 이번 발언은 ‘박 대통령의 통일관=적대적 흡수통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발언은 그동안 대외적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밝혀온, 남북간 상호신뢰 구축을 통해 점진적으로 통일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정책과 아귀가 맞지 않는다. 2015년은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북한의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중요한 시기”(12월2일 제3차 통일준비위원회 전체회의 발언)라는 진단과도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통일은 남북한, 국제사회라는 세 종류의 이질적인 청중을 동시에 만족시켜야만 가능하고, 소리 높여 외칠수록 구매 기회가 줄어드는 묘한 ‘상품’이다. 더구나 2015년은 임기가 반환점을 도는, 박 대통령으로서는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마당에 남북관계 개선이나 통일의 길을 더 멀게 할 것이 뻔한 대결적·적대적 논리를 대통령이 앞장서 외치고 있으니, 통준위가 1월 중 남북 당국자 회담을 하자고 북쪽에 전격 제안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마음이 동하기는커녕 그다음에 또 무슨 일을 핑계로 원점으로 돌아갈지 걱정이 앞선다.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페이스북 @ohtak5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