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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문학교육이 최고의 인성교육 / 도정일

등록 2014-12-18 18:35

루소의 연민의 정서나 스미스의 동감의 능력은 ‘타자를 이해하는 상상력’에 의해 자극되고 안내될 때에만 가장 잘 발휘된다. 이런 상상력을 키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서사와 시를 포함한 광의의 문학교육, 창조적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예술교육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있고 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무시하려 든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부자는 왜 가난한 자들에게 동정의 감정을 발동하지 못하는가? 가난한 자는 종종 부자에게 연민은커녕 경멸의 대상이 된다. 권력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약자는 안중에 없다. 그들에게 약자는 연민, 동정,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깔아뭉개고 내리눌러도 되는 사회적 무존재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런 행동방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가진 자들의 ‘오만’(요즘 우리 사회의 유행어로는 ‘갑질’)을 정당화할 도덕적 근거가 있는가? 부와 권력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무슨 정당성의 근거일까? 이런 문제를 곰곰이 성찰했던 근대인의 하나가 계몽시대 철학자 장 자크 루소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원천적으로 ‘약한 존재’다. 인간은 유한하고 이 유한함이 인간을 약한 존재이게 하는 이유다. 그런데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약함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며, 약자의 처지가 바로 나의 처지인 듯 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정서를 발동할 줄 안다. 사람들이 자기보다 못한 환경의 타인을 동정하고 곤경에 처한 자들에게 연민의 정을 갖는 것은 인간이 모두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약함은 인간의 공통 운명이다. 이 공통의 조건으로부터 연민과 동정의 정서가 솟아난다고 루소는 말한다. 내가 지금은 햇살 속에 있다 해도 내일은 비바람 속으로 내몰릴지 모른다. 자신도 불행한 조건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처지의 타인들을 이해하고 동정한다.

그런데 이런 이해와 동정의 능력을 마비당한 사람들이 있다. 부자와 권력자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고 루소는 주저 없이 말한다. 부자는 자기가 빈털터리 가난뱅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하지 않고 상상하지 못한다. 권력자는 자신이 약자의 처지로 굴러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하지 않고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의 상상력은 막혀 있고 마비되어 있다. 상상력의 이런 마비 때문에 대부분의 부자와 권력자들은 가난한 자들과 약자에 대한 이해나 동정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런 마비를 막자면 인간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이해, 동정, 연민의 감정적 능력이 풍부한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답이다. <에밀>이라는 책에서 루소는 가상의 청년 에밀을 등장시켜 그 청년이 어떻게 사람 같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도울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교육 비전을 제시한다. 인류의 대다수는 행운아가 아니다. 그러므로 에밀이 권력과 부에만 익숙한 인간으로 자라게 한다면 이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비상태 속으로 그를 밀어넣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루소는 생각한다.

개인적 삶에서이건 공영적 활동에서이건 간에 인간 감정능력의 발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또 한 사람의 근대인이 잘 알려진 것처럼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다. 그가 <국부론>보다 훨씬 먼저 써낸 책이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도덕감정론>이다. 그가 감정에 주목한 것은 인간의 이성적 합리적 판단에서 감정이 수행하는 역할과 비중이 아주 크다는 관찰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감정은 흔히 공적 판단에서 배제되고 있지만, 사실 감정은 도덕적 판단을 자극하고 유도함으로써 그 판단행위에 깊게 개입한다. 이것이 ‘도덕감정’이다. 경제활동이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 판단, 결정에 맡겼을 때에만 경제는 가장 자연스럽게, 가장 잘 발전한다는 것이 후일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전개한 자유시장경제론의 핵심 주장이다. 그러나 자유시장경제의 부패 가능성을 일찌감치 경고한 것도 스미스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탐욕, 독점, 오만 같은 부도덕한 이익추구에 몰입할 때 시장경제는 타락한다는 것이 그의 경고 내용이다. 자유로운 이익추구와 탐욕은 서로 다른 것이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그의 시장경제론보다는 훨씬 깊은 인간학과 문명론을 담고 있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사에는 ‘사물의 자연적 진행’과 ‘인간의 자연적 감정’이라는 서로 다른 두 차원의 자연이 개입한다. 사물의 자연적 진행은 사물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알고 이 지식을 (스미스의 ‘지식’은 요즘 말로 ‘과학적 지식’에 가깝다)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이성, 근면, 분별, 신중함 같은 능력이 발휘되는 차원이다. 또 하나의 다른 자연의 차원은 진실, 정의로움, 공경, 인간애처럼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적 감정’의 차원이다. 스미스는 이 자연적 감정을 동정 또는 동감(sympathy)이라 불렀는데, 그의 동감론은 요즘 말로 표현하면 공감능력 또는 감정이입능력인 ‘엠퍼시’(empathy)와 가깝다. 자연적 감정은 인간의 ‘선’을 지향하고 신뢰하고 지지한다. 자연적 감정은 어떤 사람이 존경할 만한 ‘선한 인간’이고 어떤 사람이 ‘악한 인간’인가를 직관적으로 판별할 수 있게 한다. 자연적 감정은 불의와 불손, 오만과 무자비함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사물의 자연적 진행과 인간의 자연적 감정이 반드시 사이좋은 동행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양자는 같이 가지 않는다. 사물의 자연적 진행은 그 진행에 순응하는 개인은 보상하고 그렇지 못한 개인은 처벌하려고 한다. 반면 인간의 자연적 감정은 사물의 진행방식에 관계없이 진실, 정의, 인간다움을 발휘하는 개인들을 지지하고 존경하며 신뢰한다. 사물의 원리와 도덕적 선의 원리는 자주 충돌한다. 그러나 사회를 지탱하자면 서로 문법이 달라 보이는 그 두 가지 원리의 상호 참조가 필요하다. 좀 투박하게 말하면 그 상호 참조란 이성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 사이의 코드 조율과 조화다. 이 조율의 사회적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스미스의 공로다. “사물의 자연적 진행이 인간의 자연적 감정에 충격을 주는 결과들을 산출하고 영리한 계산행위를 도덕적 행위보다 (일방적) 우위에 두려고 할 때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은 거기 개입해서 사태를 교정하려 한다.” “동감에 바탕을 둔 도덕적 행위는 훨씬 더 풍요로운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제공한다.” 말하자면 스미스는 시장경제가 시장원리에만 집착하는 경제중심주의를 넘어 인간의 자연스런 도덕적 감정이 존중되는 사회환경의 조성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에 큰 방점을 찍고 있다.

루소의 연민의 정서나 스미스의 동감의 능력은 사실은 ‘타자를 이해하는 상상력’에 의해 자극되고 안내될 때에만 가장 잘 발휘된다. 이 상상력이 소통과 공감의 상상력이다. 그 상상력은 나를 타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게 하고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주목하면서 삶과 경험의 복잡성을 바탕에 깐 인간 이해의 능력을 확장한다. 이런 상상력을 키우고 훈련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서사와 시를 포함한 광의의 문학교육, 그리고 여러 분야의 창조적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예술교육이다. 특히 문학교육, 꼭 교육이 아니어도 문학 읽기와 즐기기의 경험은 너무도 중요하다. 연민이나 동감 같은 도덕적 감정을 자극하고 공감의 능력을 심화시키는 일은 도덕교과서나 소위 ‘인성교육’의 매뉴얼 같은 것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인성교육은 가슴의 교육이다. 이 교육은 감정교육으로부터 출발한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르다. 문학교육은 그 자체로 최고의 인성교육이다. 초·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전 과정을 통해 문학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있고 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철저히 무시하려 든다. 시급한 교정이 필요하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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