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희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최근 정·관가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름이 ‘정윤회’라면,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장그래’와 ‘조현아’라고 할 만하다.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성실하고 능력 있지만 계약직 직원인 ‘을 중의 을’ 장그래의 처지에 울고 웃던 직장인들은 가히 ‘갑 중의 갑’이라고 할 만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맏딸)의 ‘땅콩회항’ 사건에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단순히 ‘성격 나쁜’ 재벌 3세의 갑질 정도로 치부해 술자리 안주로 소비하는 데 그친다면 제2, 제3의 땅콩회항 사건은 얼마든지 터질 것이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조현아의 것인가, 장그래의 것인가.
“감히 오너의 딸인 그분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다.”
사건 피해자인 사무장의 말이다. 조 회장은 정말 대한항공의 오너(소유주라는 뜻의 영어)인가? 조 회장 일가는 한진칼 주식의 31.69%를 가지고 있고, 한진칼은 대한항공의 32.83%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 정도 지분을 가지면 그 기업의 ‘오너’라고 불리고 절대적인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도 주식회사의 소유권과 경영권은 제도와 문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독일에는 ‘노사 공동결정제도’가 있다. 해고, 근무 규칙, 부서 이동 같은 사안들은 직장평의회에서 노사가 논의한다. 기업전략, 구조조정, 사장 선임 등을 결정하는 감독이사회에는 노동자 대표들이 이사로 들어간다.
일본은 재벌체제의 원조지만, 패전 이후 이를 해체했다. 이후 종업원들이 평생고용과 연공서열 체제 속에서 승진해 사장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 됐다. 재벌체제 때도 우리와는 달랐던 듯하다. 미쓰이 재벌 창업자의 유훈에는 ‘일족의 자식들은 어릴 때부터 사환으로 수업을 시작하게 하라’는 것이 있다. 한국의 재벌 2·3세처럼 곧바로 간부나 임원으로 들어가면 ‘바카무스코’, 곧 주인의 ‘바보자식’으로 이지메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미국은 ‘주주 이익 극대화’를 최대 목표로 내세우는 주주 중심주의다. 주주가 경영권을 가지지만, 실제 경영은 대부분 전문경영인에게 맡긴다.
한국은 형식적으로는 미국 모델을 따르지만, 실질적으로는 가족회사다. 총수 일가가 기업을 개인 소유물로, 직원을 ‘머슴’으로 취급한다. 인건비와 납품단가를 후려칠 때는 ‘주주 이익 극대화’를 내세우지만, 이번 사건처럼 주주 이익에 엄청난 손실을 끼치는 일을 저지르고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기업은 총수 일가의 것이 아니다. 주주만의 것도 아니다. 자신의 에너지와 열정을 회사에 쏟는 수많은 ‘장그래’들이 없다면 기업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현대사회에서 기업은 대부분의 사람이 깨어 있는 동안 가장 긴 시간을 보내고, 삶의 질과 행복감에 큰 영향을 받는 공간이요 공동체다. 기업을 ‘민주화’하는 것, 안으로는 주주, 경영진, 직원 등 모든 구성원에게 합당한 권리와 책임을 부여하고, 밖으로는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 민주주의만큼이나 중요한 과제다.
“오늘날 우리가 삼성이 이건희의 것이라 해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듯이, (과거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왕이 국가의 주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생각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철학자들이 왜 국가가 왕의 것인가 묻기 시작했을 때 왕의 절대적 지배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 동요는 국가가 모든 국민의 나라가 되기까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기업을 그렇게 민주화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김상봉 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중)
안선희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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