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원광대 총장, 전 통일부 장관
60년 이상 우리가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다 보니, 미국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만큼 대미 신뢰가 높고 대미 의존심도 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안보분야 종사자들일수록 그런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안보문제에 대해서 미제 정보를 신뢰하고 대처해 왔다. 동맹국이 우리를 해롭게 하거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믿음으로. 그런데 북핵 문제 발생과 전개 과정을 뒤돌아보면 우리의 그런 믿음이 순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탈냉전 분위기에서 남북총리급회담이 순항하던 1991년 여름, 미국이 우리에게 북한의 핵개발을 경고했다. 당연히 남한은 북한을 설득하여 ‘남북기본합의서’와 함께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도 체결했다. 이 두 개의 합의서 덕분에 1992년 한 해 동안 남북이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며 회담을 98회나 할 만큼 남북관계가 좋았다. 그런데 그 시간에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우리한테는 귀띔도 안 하고 북한에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북한은 주권침해라며 강력 반발했고 결국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것이 이른바 1차 북핵 위기다. 이 일로 ‘비핵화공동선언’은 사실상 사문화되었고, 한국을 배제한 채 미-북 양자대화가 시작됐다. 임기 초 불거진 북핵 문제 때문에 김영삼 정부는 남북관계에서 아무런 업적도 쌓을 수 없었다. 국제원자력기구가 아무 데나 뒤지는 특별사찰을 북한에 요구한 것은 미국의 지시 때문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클린턴 정부의 협조로 탄력을 받아 나가던 1998년 여름. <뉴욕 타임스>(8월18일치)에 “북한이 영변 대신 금창리 지하동굴에서 핵 재처리를 해왔다”는 기사가 동굴 사진과 함께 실렸다. 한·미의 보수언론은 “클린턴과 김대중은 햇볕정책을 폐기하라”고 들고일어났다. 그래도 김대중 정부는 원래 자기 페이스를 유지했다. 한편 북한은 지하동굴을 미국에 보여주겠다면서, 자기네를 모독한 데 대한 사과조로 식량 60만톤을 내라고 했다. 자신만만한 부시 정부가 지하동굴을 탐사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 정부 내 강경파들이 정보를 왜곡해서 남북관계를 견제하려다 자기 정부의 뒤통수를 때린 셈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빈 동굴을 핵시설로 해석하고 그걸 언론에 흘린 미 정보기관의 판단 능력과 의도, 즉 북핵 정보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가끔,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한국의 무기시장이 작아져서 미국의 국익에 손해가 된다고 보아 남북관계 개선에 제동을 거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봤다.
2000년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가 다시 순항하던 2002년 10월,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직접 “북한이 우라늄 폭탄을 만들기 위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HEUP)을 가동하고 있다”며 한국도 대북 압박에 동참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이른바 2차 북핵위기다. 김대중 정부는 북핵 활동을 중단시킨 ‘미-북 제네바기본합의’(1994.10)를 깨기 위해 부시 정부가 고농축 우라늄 소동을 벌인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 병행’ 방침을 견지했지만, 부시 정부의 의도대로 ‘제네바기본합의’는 일단 깨졌다. ‘기본합의’가 깨지고 나니까 2003년 말쯤,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이 슬그머니 위험성이 별로 없는 우라늄 저농축 프로그램(UEP)으로 바뀌었다. 용두(龍頭)처럼 솟구쳤던 북핵 정보가 불과 1년여 만에 사미(蛇尾)로 변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처럼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다. 그래서 북핵 문제는 빨리 해결돼야 한다. 그런데도 오바마 정부는 ‘전략적 인내’라는 미명 아래 5년째 ‘중국의 역할’과 ‘북한의 선행동’만 요구하고 있다. 최근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오겠다고 해도 반응이 없다. 북핵 능력이 정말 위험한 수준인데도 이럴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북핵 능력의 실체, 북핵 정보의 진실, 그것이 알고 싶다. 그걸 알아야 미사일방어(MD)체제를 도입할 수밖에 없는지, 전작권도 계속 미국에 맡겨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세현 원광대 총장,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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