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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강준만 칼럼] 한국 ‘자본주의’와 ‘한국’ 자본주의

등록 2014-11-16 19:31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다. 종교뿐만이 아니다. 그는 “어떤 주의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의 조선이 된다”고 했다. 역사의 추억으로 돌려도 좋을 옛날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 사상과 이론의 ‘정통’과 ‘원조’를 사랑하는 우리의 오랜 습속은 지금도 건재하다.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늘 밖만 쳐다본다. 웬 모델은 그리도 많이 수입하는지 어지러울 정도다. 이미 국내에 다 나와 있는 이야기인데도 ‘서양 석학’이 한마디 하면 처음 들어본다는 듯 귀를 쫑긋 세우고 열광한다.

이를 두고 ‘지식 사대주의’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달리 보자면 한국 특유의 개방성과 진취성의 증거일 수도 있다. 늘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면서 그곳에서 생산된 사상과 지식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향학열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는 어렵다. 후진국 시절 한국이 그런 불타는 향학열의 수혜를 적잖이 본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후진국이 아니다. 그래서 문제다. 민주주의가 사실상 없던 시절엔 서양 민주주의를 종교로 삼아도 좋을 일이었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에선 우리의 특수성을 고려한 정교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경제도 다를 게 없다. “수출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는 식의 전투적 구호 하나로 경제 문제들을 풀긴 어렵게 됐다. 따라서 수입 지식의 현실 적합성을 따지는 지식 사회학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진 세상이 되었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한국 자본주의>는 내겐 경제 관련 책이라기보다는 그런 지식 사회학을 다룬 책으로 다가왔다. 경제 관련 책이 이렇게 흥미진진할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놀라움을 만끽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에 대해 분노하는 장 교수는 ‘한국 자본주의’를 말하는 경제 전문가들에게 ‘한국 자본주의’를 말하자고 역설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보수 우파는 물론 진보 좌파도 문제다. 총론으로서의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진보 좌파는 자본주의 각론에 대해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주의 총론 비판을 서양에서 직수입해 활용하면서 자본주의 각론의 주도권을 보수 우파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있다.

서양에서 생산된 자본주의 총론 비판엔 문제가 없을까? 장 교수는 진보 좌파에게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는 신화들을 열거하면서 그 허구성을 폭로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신화, 주주 자본주의가 노동자의 저임금과 비정규직 양산에 책임이 있다는 신화, 삼성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 가능성을 부풀리고 외국 자본을 악마화하는 애국주의적 포퓰리즘 신화, 소득 1차 분배도 안 되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벌이는 ‘자산 불평등 논쟁’ 신화 등 수많은 신화들이 실증적으로 격파된다. 이 정도면 논쟁이 크게 벌어질 법도 한데 별 논쟁이 없다. 자본주의를 추상의 영역으로만 다뤄온 논객들에겐 반론을 할 실증적 자료가 없기 때문일까?

장 교수는 좌우 양쪽에서 비판받는다. 그는 ‘자본주의 고쳐 쓰기’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보수 우파는 그의 ‘고쳐 쓰기’를 비판하고, 자본주의론 안 된다는 진보 좌파는 그의 자본주의 재활용을 비판한다. 이 후자의 비판자들이 사회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위한 정치적 시도를 본격적으로 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리겠지만, 이들은 그런 시도를 하지 않으면서 추상의 세계에서만 사회주의를 지향함으로써 현실 세계에서의 검증을 피해 나간다. 그래서 경제는 보수 우파가 장악하고 진보 좌파는 선지자 역할에만 머무른다. 이런 진단이 성급한 것임을 밝혀주는 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길 기대해본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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