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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세현 칼럼] 1층 없는 2층집을 지을 수 있나?

등록 2014-11-02 18:40

   정세현 원광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 원광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박근혜 대통령의 3대 통일정책이다. 그중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 대한 애착이 많은 것 같다. 지난해 10월18일 서울에서 열린 유라시아 콘퍼런스에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처음 거론한 후 외국 지도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자주 언급했다. 지난 10월17일 밀라노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아셈·ASEM)에서는 “유럽과 아시아가 하나 되는 데 끊어진 연결고리가 바로 북한”이라며, 부산을 출발하여 유럽까지 갈 수 있도록 철도를 연결하고 물류를 확대하면 유럽과 아시아 나라들 모두가 이익이라는 연설을 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실현되기만 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구상이다. 그렇기에 내용만 보면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그러나 부산을 출발하여 육로로 유럽까지 가려면 반드시 북한을 거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유라시아 국가들이 120% 찬성을 해도 북한이 동참하지 않으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그림의 떡’이다.

그러나 외교부는 아셈 회의 51개 참가국 정상들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 전폭적 공감을 표시했다고 발표했다. 공감을 표시했다니 일단 나쁘지는 않지만, 한 나라의 정상이 공식 행사에서 발언하는데, 거기에 문제제기를 할 국가원수나 외교관이 있을까? 상대방 면전에서 하는 칭찬을 ‘외교적 찬사’라고 한다. 외교관들끼리는 외교적 찬사를 주고받으면서 내심 별 의미를 안 두지 않는가? 자기들끼리는 그러면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외교적 찬사는 자기들이 일궈낸 대단한 외교업적이나 되는 것처럼 보고하고 홍보해도 되는 건가? 자화자찬 식의 홍보는 민도가 낮은 후진국에서나 통하는 일이다.

일의 성격과 순서상 북한의 동의부터 끌어내야 하는데 박 대통령은 대북 차원에서는 초보적인 조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대신 자기 구상에 대한 외국의 지지와 협조를 당부한다. 혹시 대통령은 국제적 지지부터 받아 놓고 북한의 참여를 독려하면 될 거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층 없는 2층집은 지을 수 없듯이, 북한의 동의와 참여가 없으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애당초 추진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가능한 것처럼 보고하고 찬양을 하는 참모들로 대통령이 둘러싸여 있다면, 그건 국가는 물론 박 대통령 자신에게도 해로운 일이다. 중국 춘추전국 말기 정치권력 이론가였던 한비자는 “군주가 항아리 속에 갇힌 것처럼 바깥 소리는 안 듣고 측근들 말만 들으면(옹폐·壅蔽), 군주도 나라도 위험해진다”고 경고했다. 2200년도 넘는 옛날 얘기라고 흘려들을 일이 아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남북 철도 연결과 기차 운행을 기본으로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철의 실크로드’ 출발점이라고 불렀던 남북 철도 연결 공사는 2000년 9월18일 시작해 경의선은 2003년 6월14일, 동해선은 2005년 12월31일 끝났다. 2007년 5월17일부터 남북간 열차 시험운행도 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그걸 중단시켰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추진하기 위해 철도를 연결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시험운행까지 마친 열차운행을 재개하기로 결심만 하면 그날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추진될 수 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 대해 정작 북한은 빼놓고 외국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동북아 평화협력 관련 외교도 순서가 틀린 건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수사(修辭)가 아니라 본심에서 거론한 것이라면, 대선 공약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로 남북관계부터 복원하기 바란다. “제발 대북전단 문제 좀 해결해달라”는 북한의 요구를 ‘전제조건’이라면서 거절하라는 지시(11월2일)나 통일부에 내리면, 박 대통령은 통일분야에서 아무 일도 못하고 임기를 마칠 수도 있다. 그러고 싶지 않으면 대화 재개 분위기부터 조성해 나가야 한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고, 1층 없는 2층집은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세현 원광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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