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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 눈] 버림받은 ‘생명산업’ / 고영재

등록 2014-10-30 19:09수정 2014-10-30 21:44

정부의 쌀시장 개방, 식량주권 등 관점서 치열하게 다룰 사안
‘한겨레’ 보도는 빈약…통일 대비한 식량농정으로도 접근하길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가을은 풍성하다. 들판에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이 땅의 그 풍경은 평온과 위안, 보람의 상징물이었다. 가을이 계절의 이름이자 ‘결실’과 ‘수확’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까닭 아닌가.

가을걷이 농민들은 흥겹기만 하다. 그 뜨거운 여름날 온몸을 적셨던 땀방울의 고통은 간데없다. 삶의 원천, 생명의 뿌리인 먹거리를 내려준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 농심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그러나 올가을 농부들의 가슴은 다르다. ‘쌀시장 전면 개방’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터다.

정부는 최근 쌀시장 개방을 선언했다. 정부는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이후 굳게 닫혀 있던 쌀시장의 빗장을 활짝 열어젖힌 셈이다. 정부의 설명은 그럴듯하다. “관세화 유예를 대가로 수입하고 있는 의무수입 쌀의 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513%의 높은 관세가 수입쌀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막아낼 것이다.”

농민단체들은 쌀시장 개방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은 정부가 협상을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시장 개방을 선언했다며, 이 선언을 ‘식량 참사’로 못박았다. 농민들은 특히 쌀시장 개방 선언 시기를 한사코 미루겠다던 정부의 ‘깜짝 선언’에 분노했다.

쌀시장 개방이 지닌 역사적 상징성은 크다. 쌀은 한민족의 생명줄이자 농가경제의 대들보인 터다. 벼농사는 또한 한민족 고유의 공동체 문화 뿌리이기도 하다.

한반도 민중의 삶에 기여한 핵심 물질을 꼽자면 단연 으뜸은 쌀이다. 자연환경과 선조들의 피땀 어린 노력, 쌀의 영양학적 우수성이 결합돼 민족의 존립을 가능케 했다면 지나친 말인가. 그 옛날 농가경제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요즘 상식을 뛰어넘는다. 쌀은 곧 경제 그 자체였다. 돈으로 쌀을 사는 게 아니라, 쌀로 돈을 샀다. 그 증거가 언어생활에 숨어 있다.

농민들은 시장에 쌀을 내다팔 때 ‘쌀을 돈샀다’고 표현했다. 농지 등 부동산을 거래할 때도 그 대금 결제의 기준은 현금 아닌 ‘현물 쌀’이었다. 그 관행은 불과 40~50년 전까지 유지됐다. 지금도 남녘땅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농민들은 쌀이나 잡곡, 양념거리, 푸성귀 등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팔며 ‘돈 산다’고 말한다.

벼농사가 빚어낸 아름다운 전통의 백미는 소통과 협업의 정신이다. 맨손으로 땅을 일구던 시절, 벼농사는 결코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지깽이도 춤춘다는 농번기, 88번 농사꾼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벼농사는 이웃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두레, 품앗이를 통해 노동의 고통, 삶의 고단함을 함께 나누며 능률을 극대화했다. ‘불통’과 ‘독단’으로는 삶을 영위할 수 없었다.

이제 그 시대가 막을 내릴 채비를 끝냈다. 산업화, 새로운 기술, 디지털 문명은 이미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 터다. 정부는 이번 선언을 통해 그 시대를 앞당기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 의지의 순수성, 그 철학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정부는 어째서 그 중대한 사안을 충분한 논의와 의견수렴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하는가. 한반도 농업 역사의 물길이 바뀌는 혁명적 선언 앞에서 대통령은 도대체 왜 한마디 설명이 없는가.

정부는 개방에 따른 쌀산업 대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겠다고 약속한다. 쌀의 안정적 생산기반을 유지하고 농가소득을 안정시킬 방책을 내놓겠다고 말한다. 문제는 농민들이 그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동안의 농정이 그 약속의 허구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터다.

이를 입증하는 간단한 숫자의 추이가 있다. 1인당 쌀 소비량은 해마다 줄고 있다. 연간 100킬로그램이 넘던 소비량이 70킬로그램대로 떨어졌다. 쌀 가공식품이 증가 추세를 보이면서 전체 쌀 소비량은 그대로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쌀 생산량도 감소 추세를 보인다. 농지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쌀 자급률 100%도 이미 무너졌다. 올해도 80% 후반대에 그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쌀은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거의 유일한 농산물이었다.

협상 한번 제대로 않고 서둘러 ‘식량주권’을 포기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도 높다. 그 자세와 의지로 과연 513%라는 높은 관세장벽을 언제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다자간 무역협상(도하개발어젠다·DDA),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무서운 복병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터다.

전농 등 농민단체는 농업에 대한 정부의 철학에 고개를 젓는다. 농업의 특수성, 생명산업의 가치, 식량주권의 중대성에 대한 고뇌의 흔적이 빈약한 터다. 농업을 단순한 시장논리로 바라보는 정부의 태도에 농민들은 절망을 느낀다. 농업의 가치, 공공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농업 기반을 유지하는 선진국의 사례와는 전혀 딴판이기 때문이다. 농업·농민·농촌에 대한 언론의 무관심도 농민들은 아쉽기만 하다.

지난 1년(2013년 10월~2014년 9월)치 <한겨레>의 농업 관련 보도를 살펴봤다. 심도 높은 기획물을 찾기 어려웠다. 무너지고 있는 농촌 현실에 대한 심각한 고뇌의 흔적은 없었다. 농민들의 애타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2주에 한 번꼴로 연재되고 있는 ‘나는 농부다’ 시리즈도 기획의 뜻이 밋밋하게 느껴졌다. 지난 7월 정부의 쌀 개방 선언을 전후해 집중보도한 것이 거의 유일한 ‘심층보도’ 사례였다. 그나마 ‘깊이’에서 높은 점수를 받긴 어려웠다.

대표적인 농민단체 전농의 <한겨레> 평가는 냉정하다. “농업 보전에 대한 <한겨레>의 의지와 철학을 읽을 수 없다.” 전농은 쌀시장 개방 선언 과정에서 가장 끈질기게 보도한 신문으로 한겨레가 아닌 조중동 가운데 한 신문을 지목했다.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한겨레>의 분발과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농업은 한반도 통일의 길목에서 훌륭한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 식량 나눠먹기, 비료를 포함한 농업자재의 지원, 농업기술 전수 등이 가능할 것이다. 통일에 대비한 식량 농정은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자 가장 평화적인 방편이라는 점에서 전략적 가치가 높다. 한반도 상황에서 식량은 ‘인도적 문제이자 생명의 문제, 민족의 문제’다.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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