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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인간 문명의 성공과 실패 / 도정일

등록 2014-10-23 18:41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어떻게 살고자 했고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가라는 질문, 곧 가치와 목적의 문제에 달려 있다. 그런데 사회적 교육적 차원에서 지금은 의미, 가치, 목적의 문제를 생각하는 일은 과감하게도 시궁창에 버려진 듯한 시대다.
이 지상에서 가장 성공적이라 할 만한 생물종은 무척추동물들 중에서는 개미와 벌의 몇몇 종, 그리고 척추동물로는 인간종뿐이라고 진화생물학자들은 말한다. 진화론이 어떤 생물종의 성공 여부를 재는 개념 도구는 생존과 번식이다. 어떤 종이 이 지상에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멸절하지 않고 생존해 있는가, 자기 유전자를 충분히 퍼뜨려 멸종을 막아낼 번식력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이나 개미만이 아니라 현존 생물종들은 이 두가지 기준을 통과한 종들이다. 그런데 인간이 (개미 얘기는 잠시 빼놓고) 무엇이 유별난가. 현존 생물종들이라 해서 다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은 최근에 멸종해버렸고 어떤 종들은 지금 멸종 직전의 문턱에 내몰려 있다. 하지만 인간은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너무도 잘 먹고 잘 산다. 그는 지구 구석구석을 자기 생존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수만가지 먹거리를 만들어내었다. 그는 먹거리의 미다스다. 덕분에, 박테리아를 제외하면 지금 이 행성에서 가장 번성한 종이 인간이다. 로마제국 당시 2억5000만이었던 세계 인구는 2000년 만에 70억으로 불어나 있다.

이 성공의 비결은 무엇인가. 역시 생물학 쪽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비결은 인간의 사회성, 곧 그가 집단(사회)을 만들고 서로 협동할 줄 아는 동물이라는 데 있다. 22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적 동물’(더 정확히는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그 사회성을 요즘 진화생물학자들은 ‘진사회성’(eusociality)이라 부른다. 진사회성은 사회를 만들고 유지할 줄 아는 능력, 사회 또는 집단을 위해 협동하고 필요할 경우 개체가 자기를 희생하기도 하는 이타적 행동 능력 등을 포함한다. 이런 사회적 행동 능력이 가장 뛰어난 것이 인간이다. 그 능력 덕분에 인간은 이런저런 집단살이 과정을 거쳐 국가를 만들고 문명을 일굴 수 있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그 진사회성의 기원은 무엇인가? 인간이 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그는 무엇 때문에, 무슨 진화적 힘에 이끌려 협동이나 이타행 같은 사회적 행동을 하는 것인가?

이런 얘기가 장황해지면 신문 칼럼은 제 본분을 잃고 진화론 강의의 어설픈 흉내내기 비슷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타적 행동’(altruism)의 문제는 진화론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의 관심사이자 모든 인간의 관심사이며 사회다운 사회와 교육다운 교육의 관심사다. 그래서 이타행에 대한 설명 방식은 진화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기적 동물인 인간이 왜 이타적으로도 행동하는가? (우리는 심심할 틈이 없다. 이타행이라는 화두 하나만 잡아도 엄청난 양의 독서가 필요해지고 관찰과 사색이 요구되는가 하면 지금 우리 사회가 어째서 ‘망하는 길’로 내달리고 있다고 말할 만한가라는 문제를 놓고 친구들과 길게 토론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어째서 굶주린 여행자를 환대하고 아픈 사람을 돌보는가? 왜 도쿄의 한국 유학생 이아무개군은 전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선로로 뛰어들었을까? 진도 팽목항의 자원봉사자들은 왜 세월호 실종자 가족 천막에 가서 유족들과 함께 밤을 새웠는가? 타인의 슬픔을 나눈다는 것이 내게 무슨 득이 되는가? 전철 선로의 취객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은 내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인간이 이타적 행동을 하도록 진화한 것이라면 어째서 현대는 (지금 한국에서처럼) 인간의 이기적 성향이 무섭게 강해지는 시대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가? 지금은 인간이 파충류를 향해 역진화하는 시대인가? 진화가 비가역적인 것이라면, 역진화는 인간종의 소멸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한 토론과 응답들은 여러 분야에서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이미 나와 있는 설명들과는 다른 어떤 관점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일구고 협동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들’ 중에서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 가치를 추구하는 동물, 목적을 추구하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동물들의 용서를 구하고 말한다면) 이들 세가지 활동은 ‘인간만이’ 하는 추구행위이며,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사회적 활동과 상징적 행위의 정수다. 그 추구행위는 이 지상에서 인간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 지고 있는 윤리적 책임의 수행방식들을 대표한다. 병자를 문안하고 약자를 돕는 사람은 동정이나 연민, 측은지심 때문에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돕는 행위에는 동료 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보상적 책임의식(“우리는 같은 인간이다”)이 개입해 있다. 이 책임의식은 일부 진화론자들이 이타행을 설명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곤 하던 보상기대론(“내가 이 사람을 도우면 나도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다. 보상설만으로는 인간의 다양한 이타행이 설명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이타행의 의미는 그 무보상성에 있다.

의미, 가치, 목적은 지구 바깥에서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인간이 이 지상에 살면서, 살기 위해서, 자기 손으로 만들어 넣고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되는 ‘생존의 부채’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거대한 ‘공백’이다. 의미를 추구한다는 말은 의미가 없는 빈 자루에 우리 손으로 의미를 ‘만들어’ 넣는 행위이며, 가치와 목적 만들기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의미를 만들고 가치를 만들고 목적을 만드는 동물이다. 그는 의미가 없는 곳에 의미를 만들어 넣고 가치가 없는 곳에 가치를 주입하며 목적이 없는 곳에 목적을 세운다. 이것이 그가 사회를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문명을 만드는 방식이다. ‘목적’이라는 말은 학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사실은 그전부터) 사실상 금기어가 되다시피 한 어휘지만, 철학적 목적론이 인문학에서 말해야 하는 목적담론의 전부는 아니다.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문명을 일구어가는 데는 ‘목적의식’이 있어야 하고 ‘목적의 설정’이 필요하다. 이는 긍정적인 의미에서나 부정적인 의미에서 모두 그러하다. 우리는 왜 자본주의적 문명에 목매다는가? 왜 민주주의 사회를 추구하는가? 왜 세계화와 시장에 그토록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가? 세월호 이후의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여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이런 ‘왜’에 대답하는 데는 문명, 체제, 역사, 사회의 ‘목적’을 심문하는 일이 필요하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목적 설정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 의미와 가치의 문제다. 우리가 만들어나가고 싶은 사회, 살고 싶은 사회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누구나 일단 동의할 만한 대답은 ‘좋은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사람마다 대답은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좋은 사회의 ‘좋음’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은 있어야 하고 그 기준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필요하다. 그 동의의 확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극소수 부자를 빼면 불평등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정의가 맥을 못 추는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말할 사람도 없다. 약자가 무참히 경멸당하고 인간의 인간다움이 깨지고 짓밟히는 사회도 좋은 사회는 아니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자 했고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가라는 질문, 곧 가치와 목적의 문제에 달려 있다. 그런데 사회적 교육적 차원에서 지금은 의미, 가치, 목적의 문제를 생각하는 일은 과감하게도 시궁창에 버려진 듯한 시대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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