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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 눈] 말이 사라진 시대 / 고영재

등록 2014-08-28 19:03수정 2014-08-28 20:50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기본 일깨운 프란치스코 교황의 ‘독백론’은 한겨레에 화두던진 것
세월호법은 민생법안 아닌가? 경제민주화 실체 뭔가? 되짚어봐야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은 평범했다. 그러나 그 울림은 컸다. 말씀은 고통 받는 이들에겐 위안을, 삶이 고단한 이들에겐 희망의 빛을 안겼다. 그것은 또한 권력자들 어깨에 떨어지는 무서운 죽비였다.

교황이 유별난 화두를 내세우진 않았다.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말했을 따름이다. 그는 약자에 대한 배려의 절실함,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의 어두운 얼굴을 새삼 떠올렸다. 한반도의 차꼬, 분단의 모순은 평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보편적인 인간의 신념을 토로했을 뿐이다.

그러나 교황이 한국에 머문 100시간 동안, 시민들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 기울였다. 종교적 믿음의 울타리를 넘어, 시민들은 교황과 함께 ‘행복한 100시간’을 보냈다.

그 힘은 겸허함과 소박성,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그는 형식적인 예우를 뿌리쳤다. 그는 고급차, 좋은 숙소를 마다했다. 대신, 대통령이 외면한 세월호 유족들의 손도 잡아줬다. 그리고 진심을 말했다.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꽃동네에선 선 채로 장애아들의 공연을 지켜보았다. 대중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소탈함에 시민들은 한없는 믿음을 보였다. 위안부 할머니나 제주·밀양의 상처받은 이들도 그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교황은 보통 인간이 겪는 고통, 그리고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꿰뚫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명쾌했다. 그는 권력자, 강자의 소통 노력 없이 인간다운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웠다. “상대방의 마음을 열지 못하는 말은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생각과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들에게 향하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잠들어 있는 사람은 기뻐하거나 춤추거나 환호할 수 없다.” 깨어 있는 사람들의 작은 힘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교황이 제시한 ‘행복 10계명’에 대한 호응도 뜨거웠다. 10계명엔 인간, 평화, 자연에 대한 교황의 철학이 서려 있다. “남을 배려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인간답게 살라.” 인간다운 삶과 사회정의에 대한 교황의 통찰이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교황의 따뜻한 위로와 충고는 위안과 함께 깊은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교황의 ‘독백론’은 언론에 정치적 보도와 관련된 과제를 던진다. 정치도 말이요, 언론도 말인 터다. 정치 행위의 출발점은 말이다. 정치인은 간절한 말로 유권자들에게 읍소한다. 신명을 바쳐 나라에 헌신할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어색하지만 ‘선량’(善良)이란 아름다운 이름은 국회의원 몫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국정철학을 시민들에게 설파한다. 법을 만들고 국정을 감시하는 것도 말에서 시작된다. 치열한 정쟁의 무기도 물론 정치인의 혓바닥이다. ‘한 나라의 운명이 정치인의 세 치 혀에 달려 있다.’

그 정치는 언론을 통해 시민들에게 전달된다. 시민들은 언론의 창문을 통해 정치판을 엿볼 따름이다. 대통령의 말, 여야 대표의 말, 국회 실력자의 말이 언론의 ‘여과장치’를 거치게 마련이다. 그 말은 독백인가, 진지한 대화인가. 세월호 유족을 한사코 만나지 않겠다는 청와대의 항변은 적절한가. 장밋빛 공약은 실현성과 실천의지를 수반하고 있는가. 물구나무선 사회의 병리현상에 대한 진단은 냉철한가. 정치인들 말의 진의는 무엇인가. 그 말은 과연 진정성을 갖췄는가. 모두 언론의 판단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유감이다. 언론의 여과장치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진실과 동떨어진, 의도된 정치적 발언을 기계적으로 옮기는 경우도 적잖다. 이 관대한 보도 문화는 정치 풍토의 황폐화를 부추겼다. 정치인의 말에 대한 시민들의 통념은 뿌리 깊다. ‘정치인은 때로는 거짓말도 할 수 있지.’ 정치 불신의 출발점이 말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늘 극심한 사회분열의 큰 책임도 언론에 있는 셈이다. ‘독백의 시대’, 말이 사라진 시대의 원흉은 언론이다.

물론 ‘정치인의 진심’을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정치인의 발언은 그 자체로 보도거리가 된다는 점도 사실이다. 문제는 정치 보도 개선의 노력이고 의지다. 우선 작은 것,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볼 일이다.

언론은 진실을 담고 있지 않는 용어를 즐겨 쓴다. 정치 기사에서 두드러진다. 정치판과 언론계는 언어의 마술사들이 모인 집단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정치적 난국 탈출용으로 애용하는 ‘민생법안’만 해도 그렇다. “세월호 특별법은 논란이 끊이지 않으니 우선 ‘민생법안’부터 처리하자.” 거기엔 함정과 꼼수가 숨어 있다. 언어의 마술은 곧잘 실체와는 무관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터다. ‘민생법안’은 ‘살고 죽는 문제가 걸린 법안’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세월호법’은 ‘일반 시민의 삶과는 무관한 정쟁의 대상’일 뿐이다. ‘세월호’가 오늘의 삶은 물론, 나라의 미래가 걸린 중대사임에도.

‘경제민주화’도 박근혜 대통령의 진면목을 숨긴 ‘상징조작’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박근혜 대선 후보가 살얼음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한몫했다. 줄곧 경제민주화 소신을 피력해온, 그럴듯한 경륜과 풍모를 지닌 ‘바지 사장’까지 앞세운 정교한 계략의 성공이었다. 진실과는 동떨어진, 정치권과 언론의 합작품인 용어를 남용하는 데 <한겨레>도 예외가 아니다.

말이 사라진 시대에 ‘익명의 발언’에 대한 보도 원칙도 엄정하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기사엔 이따금 이름을 숨긴 채 ‘양심의 소리’를 토로하는 의원들이 등장한다. 말을 직업으로 삼는 정치인의 익명은 배제하는 게 원칙이다. ‘익명의 정치’는 떳떳한 정치가 아니다. 익명의 발언은 진심의 소리가 될 수 없다.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선거 승패 보도의 함정도 거듭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 승패가 민심의 흐름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터다. 드높은 국민의 탄식 속에, 최근 선거에서 뜻밖에 승리를 거둔 새누리당 모습을 보라. 투표율과 득표율만 따져보면 그 경박성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새누리당 압승.’ 큼지막한 신문 제목이 오만한 새누리당의 든든한 뒷배다.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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