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논설위원실장
지금 한반도 주변 정세를 보면, 크게는 미국과 중국, 작게는 중국과 일본이 치열한 패권다툼 중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한가운데 끼여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획기적인 대타협이 이뤄지지 않는 한, 양대 세력의 대결·경쟁 구도는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 우리로서는 좋건 싫건 이런 구도를 현명하게 헤쳐나가야만 생존과 번영을 꾀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경제 규모가 세계 15위 안에 드는 강국으로 성장했는데 너무 자학적이고 비관적인 분석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당장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간 일촉즉발의 위기, 점증하는 중국과 베트남 및 필리핀 간의 남중국해 갈등, 중국에 대드는 나라들을 뒤에서 응원하는 미국과 이에 격하게 반발하는 중국의 태도를 보라. 이런 움직임을 목도하면서도 소름이 돋지 않는다면 무모하게 담대하거나 지극히 둔감한 것이다.
양대 세력은 날이 갈수록 격화하는 갈등 속에서 우리에게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묻고 있다. 답을 않고 애매모호하게 넘어갈 여유조차 주지 않고 몰아친다. 당장 결론을 내리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 최전선에 있는 것이 바로 미국 주도의 미사일방어(MD·엠디) 체제 참여 문제다. 이에 비하면 박근혜 정부가 대외정책의 대표선수로 내세우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통일대박론,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한가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박 정부는 한가한 것은 앞세우고 긴급한 것은 얼버무리고 있다. 시간이 걸리고 환경 정비가 필요한 거대 담론과 고통스럽지만 긴급하게 해법을 내놔야 할 문제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안보 정책을 주도한 이종석씨가 최근 펴낸 <칼날 위의 평화>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2006년 7월5일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2호를 쏘기 전인 6월17일, 조지 부시 미국 정부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우리 정부에 요청하는 사항을 담은 논페이퍼(비공식 문서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문서)를 보내왔다. 이씨가 요약한 미국 쪽 핵심 요구는 대북포용정책을 포기하고 엠디 체제를 수용하라는 것이다.
이씨의 증언은 지금 미국이 박 정부에 가하고 있는 엠디 참여 공세의 강도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그때는 엠디에 대한 노 정부의 반대 입장이 분명했는데도 물밑에서 이런 요구를 해왔다. 지금은 논페이퍼와 같은 얼굴 없는 압박이 아니라, 버락 오바마 대통령부터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 미군사령관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노골적으로 엠디 참여 요구를 하고 있다. 더구나 박 정부 쪽은 “미국 엠디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상호운용성의 강화는 필요하다”는 모호한 논리로 문을 반쯤 열어두고 있는 상태다. 2015년 돌려받기로 되어 있는 전시작전권을 또다시 연기해 달라고 매달리는 바람에 약점도 단단히 잡혀 있다.
최근 미국의 압박이 점차 구체화하면서 우리 정부는 더 이상 불참도 아니고 참여도 아닌 듯한 ‘선문답’으로는 대응하기 어렵게 됐다. 미국이 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사드·THAAD)의 주한미군 배치를 들고나오면서 저고도 방어를 하는 한국형 엠디(KAMD)와 미국 엠디는 다르다는 말로 피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장 중국은 관영 <신화통신>의 논평을 통해 한국의 미국 엠디 편입에 대해 “중국과의 관계를 희생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으로선 사드 배치를 중국 미사일 견제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미국의 압박에도 미-중 대결의 최전선에 몰릴 수밖에 없는 엠디 참여를 거부할 것인지, 중국과의 경제나 대북 협력보다는 동맹을 중시해 엠디에 들어갈 것인지, 미·중을 함께 만족시킬 수 있는 묘수를 찾든지 해야 한다. 분명한 건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새 외교안보팀은 더 늦기 전에 머리를 싸매고 이 문제부터 풀어내야 한다. 하지만 미세 조정에 그친 새 팀에 그런 자각과 의지, 능력이 있는지가 의문이다.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페이스북 @ohta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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