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논설위원실장
우리나라에도 일본처럼 한 해 동안 새로 만들어졌거나 유행했던 말을 뽑아 시상하는 행사가 있다면, 올해는 단연 ‘기레기’가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인 이 단어만큼 이 시대 언론의 병폐를 적확하게 포착한 말도 없을 것이다. 왜 언론이 이 지경이 됐고, 기자가 이 정도로밖에 대접받을 수 없게 됐는지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참담하다. 고개를 들 수 없다. 세월호 침몰이라는 참사가 없었더라면 기자들이 이런 손가락질을 받는 줄도 모르고 지냈을 것이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하다.
세월호 보도 과정에서 기자들이 지탄받는 이유는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왔으니, 큰 것 두 가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하나는 청와대의 인사 및 보도 개입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국방송(KBS) 사태’이고, 또 하나는 기자들이 권력에 알아서 기는 모습을 보인 청와대 기자단의 ‘대변인 비보도 요청 파기 기자 징계 사건’이다. 이 두 사안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청와대와 언론의 ‘추악한 유착 관계’가 드러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하나다. 전자가 청와대에서 방송사로 내리꽂는 ‘하향식 기레기 생산구조’를 보여준다면, 후자는 기자들로부터 청와대로 향하는 ‘상향식 기레기 생산구조’를 증언해준다.
한국방송의 문제는 세월호 희생자 수를 교통사고 사망자 수에 비교했다는 이 방송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발언에서 촉발됐다. 분노한 유족들이 한국방송 앞에서 항의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길환영 사장과 김 전 국장은 이들이 청와대로 몰려가고 청와대에서 신호를 보내오자마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과를 하고 보직 사퇴를 했다. 청와대 정무수석은 유족의 항의를 해결하는 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털어놨고, 떨려난 보도국장은 그동안 경험했던 청와대→사장→국장으로 이어지는 보도 통제의 실상을 폭로했다. 이로써 청와대가 방송을 쥐락펴락한다는 소문은 사실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이후 한국방송 안에서 ‘사장 물러가라’ ‘못 물러간다’고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지만, 똑똑한 시민들은 벌써 길 사장 체제는 ‘끝났다’는 걸 직감하고 있다.
청와대 기자실 건은 권력의 직접 개입 없이 우리나라 ‘1호 기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추태라는 점에서 더욱 참담하다. 세월호 유족들이 너무도 황망한 나머지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있던 진도 체육관에서 교육부 장관이란 자가 태연하게 컵라면을 먹고 있는 모습이 전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터에, 청와대 대변인이 ‘끓여 먹지도 않고 계란을 넣은 것도 아닌데’라고 변호한 것을 기사화했다고 기자실 출입정지 징계를 내렸다는 이 사실을 정상이라고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그들뿐이지 않을까. 대변인이 비보도 요청한 사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보도한 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하는데, 비도보 요청이 대변인의 망언까지 보호하는 제도가 아닐뿐더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징계하는 건 그들 스스로 청와대 친위대이거나 코미디언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문제는 한국방송이건 청와대 기자실이건 한바탕 광풍이 지나가면 원위치로 복귀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한국방송은 사장과 보도국 간부들의 얼굴만 일부 바뀐 채 ‘청영 방송’을 계속 이어갈 것이고, 청와대 기자실도 앞으론 함부로 비보도 요청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공허한 결의만 다진 채 권력의 호위무사 노릇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기레기에서 탈피할 수 있는 제도를 강구하는 일이다. 한국방송 사태와 관련해선 사장 선출에 권력의 입김이 작용하지 못하도록 사장선출제도를 뜯어고쳐야 이런 일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청와대 기자실 사건은 기자실을 권력과의 야합·협조의 골방에서 권력에 대한 비판·감시의 마당으로 바꾸지 않는 한 언제든지 터져 나오게 돼 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기자실을 해체하거나 탈퇴하는 게 정답이다. 그런 결의와 행동 없이는 결코 기레기에서 탈출할 수 없다.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페이스북 @ohta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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