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희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 이는 같은 보수정부라도 이명박 정부가 추구했던 ‘엠비노믹스’에서는 크게 선회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5년 전 취임사에서 경제 살리기가 무엇보다 시급하다며 감세, 공기업 민영화, 규제완화, 시장개방 등 친시장·친기업 정책들을 전면에 내세운 바 있다. … 이런 정책 전환은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양극화, 경제력 집중 등의 문제를 감안할 때 의미있는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지난해 2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에 대해 썼던 해설기사 중 일부다. 1년여가 지난 지금 보니 ‘오보’에 가깝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박 대통령의 취임사는 ‘경제민주화’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의 선순환’ ‘콩 한쪽도 나눠 먹는 정신’ ‘공동과 공유의 삶’ 등의 수사로 차 있었다. 인수위원회 국정과제집에서 ‘경제민주화’ 단어가 사라지는 등 조짐이 있긴 했지만, 기대를 버리기에는 조금 일러 보였다. 당시 새누리당을 출입했던 후배 기자는 얼마 전 이렇게 말했다. “정말 나는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할 거라고 믿었어요. 대선 전에 새누리당 분위기는 정말 그랬어요.” 박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면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
박 대통령은 올해 들어 신년구상(1월6일), 경제혁신 3개년 담화문(2월25일) 등 경제 분야에 중점을 둔 발표를 이어갔지만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규제완화를 하면 일자리가 생겨 모두에게 좋다’는, 이명박 정부 시절 이미 파산선고를 받은, 그 자신이 경제민주화 공약으로 수정을 약속했던 ‘낙수효과론’을 마치 새로운 정책인 양 멀쩡한 얼굴로 꺼내들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9일 세월호 참사 대책을 내놓았지만, 자신의 정책 기조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참사의 원인 중 하나로 무분별한 규제완화를 꼽는 여론이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고 있지만, 참사 직전까지 자신이 밀어붙이던 ‘규제개혁’ 드라이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일부 보수층은 “규제가 있으니 공무원이 힘이 생기고, 그래서 부정부패가 생긴다. 이번 기회에 규제를 더 없애야 한다”는 궤변을 펼치고 있다.
서양에는 19세기까지 사혈법(피뽑기)이라는 치료법이 있었다. 피와 체액이 적당한 비율로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근거해, 환자 몸에서 피를 뽑아내는 치료법이다. 당연히 대부분 환자는 낫지 않았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목에 염증이 생겼는데, 주치의가 피를 2.3리터(전체 피는 5.4 리터 정도)나 뽑아내 결국 죽고 말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우파 경제학자들을 비판하면서 “피를 뽑는 치료법을 맹신하던 중세의 치료사들이 환자가 회복되지 않으면 한번 더 피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21세기 경제학계의 피뽑기 치료사들은 자신의 신념을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 곳곳은 세월호처럼 위태위태한 상태다. 파이를 키우기만 할 뿐 나누지를 않으니, 양극화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성장이 제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잠재성장률은 추세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피뽑기 치료사들’이 스스로 치료법을 바꿀 리는 없다. 아픈 것은 환자이지 자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들은 이 치료법으로 주머니가 계속 두둑해지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들은 “좀더 피를 뽑으면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벌써 50년째다. 이제 환자들이 나서 당장 엉터리 치료를 그만두라고 소리쳐야 한다. 이젠 정말 멈출 때가 됐다. 이젠 정말 바꿀 때가 됐다.
안선희 경제부 정책금융팀장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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