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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통일은 수박이다 / 윤구병

등록 2014-04-03 19:08수정 2014-04-03 23:29

윤구병 농부철학자
윤구병 농부철학자
제철에 수박 농사를 짓는 시골뜨기들이 한여름에 먹는 수박과 ‘도시것’들이 아무 때나 청과물 가게에서 골라 드는 수박은 맛부터 다르다. 대통령 손에 들린 ‘대박’이 ‘철없는’, 또는 ‘철 지난’ 수박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내가 제철 농사만 고집하는 ‘촌늙은이’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다. 씨앗 속에 간직된 앙증스러운 잎이 맨 처음 햇볕을 받으려고 땅 위로 고개를 내민 것이 떡잎이다. 이 두 잎이 마주나서 햇살을 받을 때 거기서부터 그 나무가 잘 자랄 수 있겠는지 없겠는지 점칠 수 있다는 말이다. ‘싹수가 노랗다’는 말도 있다. 아예 희망이 없다는 말이다.

어느 날 대통령 입에서 함박웃음과 함께 “통일은 ‘대박’이에요” 하는 말이 나왔을 때 그 낱말이 좀 거시기하기는 했지만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우리 조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시키기 위해서 다 같이 죽자”는 연설을 ‘국정원’ 원장이 직원들에게 하고 난 지 얼마 안 되어 나온 말이어서 뒤끝이 찜찜하기는 했지만.

저 멀리 손에 들고 있는 저 ‘대박’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고루 나눌 수박인지 쭈그러진 쪽박인지 아직은 알 길이 없다. 이쯤에서 수박 타령을 한마디 하자.

먼 옛날 ‘4·19 혁명’이 일어나고, ‘데모대’가 ‘3·15 부정선거’ 끝에 ‘부통령’으로 당선된 지 얼마 안 되는 이기붕의 집을 뒤진 적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들어갔던 이강석이 제 친아버지(이기붕)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그 집에서 수박이 나왔다. 한겨울에도 수박을 길러내는 ‘하우스 농사’도 없었고, 일반 국민은 냉장고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으니,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났으되, 아직 싱싱한 그 수박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밖에. 겨울난 수박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부귀영화’와 ‘특권의 상징’으로 여겨졌겠지. 그래서 그 수박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겠지.

제철 농사가 사라져 요즘 도시내기들은 아무 때나 수박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제철에 수박 농사를 짓는 시골뜨기들이 한여름에 먹는 수박과 ‘도시것’들이 아무 때나 청과물 가게에서 골라 드는 수박은 맛부터 다르다. 대통령 손에 들린 ‘대박’이 ‘철없는’, 또는 ‘철 지난’ 수박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내가 제철 농사만 고집하는 ‘촌늙은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때 6·25는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는 말을 했던 사람이 있다. ‘종북좌파’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군으로 6·25 때 참전했고 나중에 해군 참모총장까지 지냈던 사람이 미국에서 기자들을 모아 놓고 한 말이다. 그럴 만도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는 ‘우리의 맹세’를 외쳤다. ‘하나,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다. 둘,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셋,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고 남북통일 완수하자.’ 이 ‘맹세’는 1949년 7월에 ‘문교부’가 지시해서 모든 교과서와 그 시절에 출판된 책들에 의무적으로 싣게 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인민’에게 달달 외도록 한 ‘황국신민서사’와 빼닮은 이 ‘우리의 맹세’가 6·25가 터지기 1년 전부터 학교 운동장에 쩡쩡 울려 퍼졌다. 이 말을 한마디로 뭉뚱그린 것이 ‘우리 조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시키기 위해서 다 같이 죽자’가 아닌가? 그러니 이승만 머릿속에도, 그 시절에 통일 교육을 받았던 나 같은 늙은이의 머릿속에도 통일이라면 ‘북진통일’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6·25 전의 국민의식이 이러했을진대, 전투에 직접 몸담았던 ‘국방군’ 입에서 6·25 북침설이 나왔으니, 그리고 그것이 일등병이나 이등병으로 싸웠던 사람 말이 아니고 전직 해군 참모총장이 입 밖에 낸 말이니, 어떤 말이 ‘정설’인지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이야기가 잠깐 빗나갔다. 다시 수박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요즘 도시에서는 수박이 꼭지만 잘린 채 청과물 가게에 알몸으로 나둥그러져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 자라는 수박은 다르다. 까만 씨앗을 봄철에 땅에 묻으면 거기서 떡잎이 나오고, 순이 돋고, 넝쿨이 뻗고, 노란 꽃이 피고, 꽃받침 아래 달린 조그마한 열매가 눈에 띄지 않게 자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불볕더위 속에서 천천히 익어 간다. 온종일 땡볕에서 베적삼이 흠뻑 젖도록 밭을 매다가 다 자란 수박을 손가락 등마디로 톡톡 두드리면 개중에 ‘나 다 익었소. 따서 드셔도 되오’ 하고 속삭이는 놈이 있다. 조심스레 따 안고 두레박에 넣어 우물에 띄워 식히고 난 뒤에 식구 모두 둘러앉아 칼끝만 대도 쩍쩍 갈라지는 놈을 너도 먹고 나도 먹는다. 그때 잇몸에, 혀끝에, 목구멍에 닿는 맛이 수박의 제맛이다.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이 맛을 안다. ‘촌것’들이 먹는 수박에는 씨앗에서 다 익을 때까지 수박의 성장 역사가 다 들어 있다. 수박을 먹을 때 시골 아이들은 파란 껍질 속에 담긴 빨간 살 맛만을 즐기는 게 아니다. 그 수박이 싹 트고 자라는 전 과정을 함께 맛본다. 그 수박을 먹으면서 그 수박에 스민 봄철, 여름철도 같이 받아들여 ‘철이 들고’, 그 수박이 어렵사리 난 한철, 한철을 곱씹으면서 ‘철이 난다’. 이렇게 수박이 입에 들어올 때까지 겪어 온 그 긴 기다림과 조바심, 그 수박을 기르기 위해서 흘린 땀과 애씀까지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땀 흘려 심고 가꾸어도 나날이 올라오는 가라지 뽑고 벌레 잡아 주지 않으면 망치기 쉬운 것이 수박 농사인데, 수박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수박 꽃이 빨간지 노란지, 제대로 익었는지 설익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이제 갓 떡잎 올라오는 수박 밭두렁에서 ‘우리 모두 와서 수박 잔치 벌여요’ 하고 외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넋 나간 여편네’로 보기 십상이다.

어느 날 푸른 기와집 앞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 한가운데 수박 비스름한 것이 놓여 있다고 치자. 그걸 기르고 가꾸는 데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잡것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저마다 선무당 칼춤 추는 데 쓰는 칼로 푹 찔렀을 때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흥부네 제비가 물어다 준 씨앗에서 자란 박에서 나온 ‘금은보화’일지 놀부가 제비 다리 부러뜨려 억지로 얻어낸 박에서 쏟아진 ‘저승사자 똥물’일지 어찌 알겠는가. ‘통일’이 ‘대박’이 되려면 그놈의 박이 호박인지, 수박인지, 뒤웅박인지, 깨진 쪽박인지라도 가려볼 눈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나라 안팎을 나대면서 ‘통일 대박’을 입으로만 터뜨린다고 해서, 어느 날 뜬금없이 ‘부랄타 너조타’ 주문을 읊는다 해서 ‘통일’ 띠를 두른 삼돌이가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무슨 일이든지 분부만 있으면 알아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요, 공주님’ 하고 호리병에서 나타나 머리 조아릴 것도 아니고. 감나무 아래 입 벌리고 누워 익은 감 떨어지기 기다리는 철딱서니 없는 꼴이라니, 쯧쯧.

제철 음식 못 먹어서 철들지도 철나지도 못한 철없는 것들이 이승만 식, ‘북진통일’을 또다시 들먹이면서 멀쩡한 사람 간첩 만들기에 바쁜 시절에 ‘통일부’는 뒷전에 제쳐놓고 따로 ‘통일 위원회’ 비슷한 것을 꾸리려는 속셈은 무얼까? 혹시 ‘통일 대박몰이’로, 지난번 헛공약에 속아 우르르 몰표를 던진 사람들의 돌린 등을 되돌이켜 또 표를 얻겠다는 ‘꼼수’가 아닐까?

이러다가 잘못하면 60년 전에 ‘통일의 제단’에 바쳐진 300만이 넘는 ‘원혼’들로도 모자라 ‘북침’인지 ‘남침’인지 모를 전쟁이 다시 일어나 그 열곱인 3000만이 바쳐지지나 않을까?

‘우리의 소망은 통일’인데, 그 통일은 ‘남누리’와 ‘북누리’가 두 떡잎 마주나듯이 만나야(‘만나다’는 ‘맞나다’와 말뿌리가 같다) 이루어질 수 있겠는데, 사나운 짐승들 사방에서 입 벌리고 잡아먹으려 드는 마당에 ‘박타령’ 그만두고 귀농해서 호미 들고 다소곳이 엎드려 수박 농사나 지으셨으면.

윤구병 농부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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