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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규제’의 어머니는 ‘갈등’인데… / 김영배

등록 2014-03-30 18:36

김영배 경제부장
김영배 경제부장
규제 장치의 집대성이랄 수 있는 법령들이 모여 있는 법제처 누리집(홈페이지) ‘법령검색’ 코너에서 ‘규제’를 입력해봤다. ‘규제’라는 단어를 포함한 법률은 모두 15개였다.

맨 앞자리는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이 차지하고 있었고,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사행행위 등 규제 및 처벌 특례법’ 따위도 함께 들어 있었다. 무게감 있어 보이고 규제의 대표 격이랄 수 있는 것은 단연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이다. 흔히 공정거래법이라고 일컬어지는 법 이름 앞자리를 차지한 ‘독점 규제’라는 표현에 새삼 눈길이 간다.

공정거래법은 1980년 말 제정돼 이듬해 4월부터 시행됐다고 ‘공정위 30년사’는 전하고 있다. 법 제정 시기는 전두환 군사독재가 시작된 해였다. 전두환 정권의 슬로건 ‘정의구현’만큼이나 ‘공정거래’라는 단어도 당시의 정부 성격과는 너무 동떨어져 생뚱맞아 보이기까지 한다.

답은 시대 상황에 배어 있다. 전두환 정권 이전 16년에 걸친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부작용과 그에 따른 파열음이 공정거래법 제정을 불러온 실마리였다. 개발독재는 한국 경제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대신 불균형 확대, 시장기능 왜곡을 낳았고 무엇보다 독과점 구조 심화라는 폐해로 이어졌다고 공정거래법 제정 당시 상황을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공정거래법의 국제적 모델에 해당하는 것은 ‘경쟁 체제의 헌법’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독점금지법이다. 1890년에 제정됐으니 한국에서 공정거래법이 제정되기 90년 전이었다. 미국 독점금지법은 법안 제안자의 이름을 딴 셔먼법(Sherman Act)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약 1세기에 가까운 시차와, 태평양이라는 공간적 격차를 두고 떨어져 있지만 법 제정의 배경은 매우 비슷했다. 셔먼법 제정 직전인 19세기 미국에선 석유, 철도 같은 주요 산업에서 소수 대자본 주도의 독과점이 극심했다. 석유왕 록펠러가 미국 석유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시절의 얘기다. 셔먼법 제안자인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존 셔먼은 석유왕의 ‘스탠더드 오일’을 겨냥해 “정치 체제로서 ‘군주’를 원하지 않듯 경제 체제로서 ‘독점’을 원치 않는다”고 주창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규제장치에서 대표선수 격에 해당하는 법규에서 교집합 단어는 ‘독점’이다. 미국에서 셔먼법을 제정하기 114년 전인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비롯된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내맡긴 ‘자유방임’이 독점을 낳고 그에 따라 견딜 수 없게 치열해진 갈등이 규제 장치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규제는 자본주의의 자본을 옥죄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을 온존시키려는 몸부림의 산물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원리인 자유방임은 독점을 낳았고, 독점은 상·하류의 격차를 벌리고 갈등을 초래했으며, 그 갈등을 봉합하려는 고달픈 노력의 결실이 규제였던 셈이다. 규제 장치는 대체로 그런 성격이었다. 시대에 따라 규제는 강화되거나 거꾸로 완화돼 왔는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뒤 국제적인 대세는 강해지는 쪽이다. 그 밑바탕 또한 갈등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돌연 시대의 화두로 꺼내든 규제 완화는 적어도 ‘글로벌 스탠더드’(국제 표준)의 현재 흐름에는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처방의 지점도 잘못됐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게 뿌리(갈등)를 방치하고 잎사귀(규제)를 건드리고 있어서다. 정말, 한번, 돌아보자. 규제, 왜 생겼는가? 갈등을 방치하거나 키우는 규제 완화는 필시 규제 가짓수를 더 늘리는 쪽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김영배 경제부장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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