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시민편집인의 눈
독자들의 가슴 촉촉이 물들인 ‘세 모녀의 비극’ 집중보도
보수-진보 틀 갇힌 민심읽기 답답…규제개혁 비판도 미흡
독자들의 가슴 촉촉이 물들인 ‘세 모녀의 비극’ 집중보도
보수-진보 틀 갇힌 민심읽기 답답…규제개혁 비판도 미흡
봄기운이 싱그럽다. 푸른빛 새싹은 언제 보아도 경이롭다. 자연의 순리 앞에서 우리는 역사 발전의 길을 배운다. 무릇, 권력의 오만은 부조리와 모순을 낳고, 아무리 강고한 체제도 순결한 작은 열정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법.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 곧 ‘진보주의’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한겨레>는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적 신문’이다. <한겨레>의 ‘진보성’이 ‘보수’가 지배하는 척박한 한국 언론 풍토에 새바람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솟는다. <한겨레>가 ‘진보’를 남용하는 것은 아닌가. ‘진보-보수’의 틀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게 적절한 것인가.
‘진보-보수의 틀’이 언론계에 제법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 대선과 총선 등 주요 선거에서, 또는 갖가지 사회적 논란을 둘러싼 분석기사에서 이 틀은 널리 활용되고 있다. 언론매체들은 스스로 ‘진보지’ ‘보수지’를 자처하거나 상대를 지칭하는 데 익숙하다. <한겨레>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보수지-진보지 타령’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언론의 부조리, 사회적 쟁점을 은폐·호도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언론에 대한 기대는 지극히 소박하다. 그들은 ‘일당 5억원 노역’의 부조리에 분노할 따름이다. 그에게 ‘황제 노역’을 선사한 판검사의 자비심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정당하게 사임한 것인가, 아니면 불법적인 음모의 소산인가. 독자들의 궁금증은 간명하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너무나 당연한, 원초적 감정의 표현이다. 정의는 언론이 좇아야 할 으뜸 덕목이다. 거기엔 ‘보수’ ‘진보’가 끼어들 틈이 없다.
국정원의 ‘대선 부정’ 역시 이념적 좌표와는 무관한 사건이다. 헌법 정신을 짓밟은 중대한 범죄를 누가 옹호할 수 있겠는가. 누가,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 어떤 규모로 ‘부정’을 저지른 것인지 그 진상을 철저히 수사했는가. 그 사법처리는 적절하게 이뤄졌는가.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민감한 이슈도 마찬가지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도 이념적 틀에 맞춰 접근할 일이 아니다. 정략적 집단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 실체가 궁금할 따름이다. 그들은 과연 내란을 음모한 것인가. 그들에 대한 법의 심판은 정당했는가. ‘진실’을 능가하는 언론의 가치는 없다. 언론의 본령에 비춰볼 때, ‘보수’ ‘진보’는 군더더기다.
물론 이념적 ‘취향’에 따라 보도방향이 엇갈릴 만한 사안도 없진 않다. 예컨대 제주 해군기지, 원전정책, 경제민주화, 복지의 기조 등이 그것이다. 저마다 다른 세계관, 철학적 통찰력과 무관하지 않은 터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국 언론 풍토에서는 무의미하다.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에서 철학적 통찰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민심을 진보-보수의 틀에 비춰 읽어내는 방식도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최근 선거 결과를 놓고 ‘보수화의 고착화’ ‘젊은층의 보수화’ 등을 기정사실화하곤 했다. 과연 적절한 판단일까. 선거에서 이념적 잣대가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근거는 없다. 일부 언론의 편파성, 종편의 권력 유착 등 현상이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
거짓에 찌든 언론문화의 독소는 혼돈을 부추기고 있다. 진보-보수의 틀 안에서, 거짓이 ‘신념과 철학’의 차이로 포장되기도 한다. <한겨레>는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게 마땅하다고 판단한다. 대신 진실의 전령사로서, 지면 자체의 생명력을 높이는 데 역량을 집중할 일이다.
좋은 사례가 있다. 지난 2월28일치 <한겨레>는 시민들 마음을 뒤흔들었다. 1면 머리기사 ‘마지막 월세만 남긴 채…벼랑끝 세 모녀의 비극’의 파장은 멀리 번졌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삶을 마감한 세 모녀의 참담한 사연에 독자들은 가슴 아파했다. 정치인, 행정당국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대통령까지 나서 허술한 사회안전망에 대한 점검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자칫 사회면 구석에 묻힐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한겨레>는 이 비극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얼마나 하루하루의 삶이 고통스러웠으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까. 복지 체제는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가. 그 경황 중에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 70만원을 집주인에게 남기다니…. <한겨레>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대로 비춰 보여줬다. 많은 독자들에게 성찰의 계기가 됐음직하다. 이는 <한겨레>의 따뜻한 가슴이 남긴 선물이라고 이해한다.
그렇다. ‘진보정신’은 인간에 대한 따스함에 있다. <한겨레> 지면엔 논리적으로만 진보적인 측면도 엿보인다. 이런 현상은 노동·농민 등의 부문에서 두드러진다. 적어도 양적으로는 어느 매체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질적인 깊이까지 충분한지는 의문이다. 노조를 결성할 힘도 없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삶의 현장이 조명되는 일은 거의 없다. 농민, 농촌, 농업이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 꽤 오래됐다.
<한겨레>의 진보성과 관련된 한 기자의 항변도 있다. 최근 한겨레신문사 ‘사내게시판’에 실린 글이다. 3월21일치 1면 머리기사 ‘박 대통령, 규제와의 전쟁 선포…결국 줄푸세로 회귀’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그 내용을 간추려 옮긴다.
“기사는 ‘규제개혁 드라이브는 지난 대선 때 규제 체계의 합리성을 강조하던 태도를 180도 뒤바꾼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평가’에 대한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두 전문가의 코멘트도 ‘일반론’에 불과하고 논지가 모호하다. 박 대통령은 매우 교묘하고도 전략적으로 바둑돌을 놓고 있는데, 우리 지면은 자칫 ‘<한겨레>=진보=규제론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줄까 걱정된다.”
기자의 지적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 그날의 ‘이벤트’에서 ‘여론조작’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방송 3사가 4시간 동안 국민들에게 시청을 ‘강요한’ 것은 명백한 ‘폭거’였다. 그 의도의 순수성은 의심받을 만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규제개혁 시책의 허상을 생생하게 보여주진 못했다. 앞으로 남겨진 과제이기도 하다.
스스로 ‘진보지’라고 일컫는 것은 어색하다. 지면 위에 진보적 신념을 차분하게 구현할 일이다.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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