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민주주의가 문화라면, 말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역사를 봐도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말을 권하는 문화와 말을 권하지 않는 문화가 갈라졌다. 아테네는 수다스러웠고 스파르타는 과묵했다고 한다.
아테네에서는 남들에게 훌륭하게 말하고 결과적으로 옳은 것으로 확인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시민들한테 존경받았다. 모든 전제가 명료하게 제시된 말하기, 찬성과 반대 의견을 고루 검토하는 말하기, 멋지고 훌륭하게 말하기, 무엇이든 주저없이 말하기 등이 덕목으로 꼽혔다. 아테네의 지도자인 데모스테네스는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그것을 활용한 공동체의 집합적 결정이 민주적 정치문화의 핵심임을 간파했다.(이준웅, <말과 권력>)
아테네가 논거와 논증을 갖춰 ‘풍부하게’ 말하는 문화를 꽃피웠다면, 스파르타는 콱 찌르고 들어가는 직격 화법을 좋아했다. 어떤 아테네 사람이 스파르타 사람들의 단검이 짧은 것을 보고 뭐에 쓰겠냐, 요술쟁이라면 삼켜버리겠다고 비웃었다. 이에 스파르타의 왕은 “우리가 보기에는 적을 찌르기에 충분하오”라고 답했다. 입법가 리쿠르고스는 어떤 사람이 스파르타에 민주주의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자 “친구여, 당신 집안에서나 민주주의를 세우시구려”라고 무질렀다. 병영국가 스파르타에서는 전쟁터에서 써먹을 짧은 말이 주로 필요했던 것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이 강렬한 직격 화법을 자주 구사하고 있다. 얼마 전 규제 개혁을 논한 청와대 회의에서 그는 “쓸데없는 규제는 우리의 원수”라고 했다. 또한 “우리 몸을 자꾸 죽여가는 암덩어리라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들어내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했다. 규제 개혁을 하지 않는 행위는 “자나 깨나 일자리를 갖고 싶어하는 국민 소망을 짓밟는 죄악”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직격 화법은 정책 과정의 합리성을 해칠 염려가 있다. 대통령이 규제와의 전쟁이라면서 서슬 퍼렇게 나아가고, 감사원 사무총장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선례나 민원 가능성을 들며 규제 개혁에 소극적으로 나오면 비리로 간주하고 엄단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런데 간이 졸아들지 않을 공직자가 있겠는가. 옥과 석을 구분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데 꼭 필요한 규제까지 마구잡이로 없애버릴 위험이 크다.
대통령의 화법은 토론의 원리에도 어긋났다. 규제 개혁을 주제로 한 청와대 회의에서, 장관과 민간 기업인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끝장토론을 벌였다지만 끝장토론이란 말에 걸맞게 언론의 자유를 누린 것은 대통령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미리 준비한 자료를 죽 읽어내려간 게 고작이었다. 오후 2시부터인 토론을 앞두고 오전 10시부터 예행연습도 했다고 한다. 휴식도 거의 없이 7시간이나 토론을 이어갔는데도 아테네식의 수다스러움보다는 스파르타식의 과묵함이 지배한 것이다.
토론을 토론답게 하려면 엔분의 1(1/n) 원칙이 중요하다. 권력을 쥔 특정인만 발언 기회를 독점하지 말고 참석자가 고루 시간을 나눠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토론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개발하는 것을 돕는다. 하긴 우리나라 기업과 관청의 회의 현장을 보면, 대부분 언어 독점의 문제점을 안고 있으니 이 점은 박 대통령만 비판할 일은 아니다.
규제 개혁의 성패는 좀더 두고 봐야 안다. 하지만 민주적 정치 문화, 즉 말하기 문화 차원에서 볼 때 대통령의 화법은 생각해볼 점이 있다. 무엇보다 스파르타식 직격 화법보다는 아테네식의 풍부한 말하기가 민주주의에 좀더 어울리고 국정 효율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는 점을 이해하면 좋겠다.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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