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중학교 입학을 앞둔 해였으니, 1979년에서 80년 사이의 겨울이었다. 그 몇 해 전부터 방학 때면 남쪽 지방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 함께 지내다 돌아오곤 했다. 친구들이 생기고 골목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는 어른도 늘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한켠에 소를 길러도 좋을 만큼 넓은 부엌이 딸린 방 한 칸을 얻어 이사했다. 방에는 길가로 난 두쪽짜리 창이 있었다. 그날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혼자 예습을 하고 있었다. 오후에 외출한 아버지는 웬일인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사방이 고요했다. 문득 뒤통수가 따가웠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열어보았다. 인적 없는 골목은 어두웠다. 몇 번 더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방의 세간은 단출했다. 훔쳐갈 것도 들여다볼 것도 없는 소박한 방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다 끝나갈 무렵, 잠깐 상경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간첩으로 오인받아 파출소까지 갔다 왔다는 것이다. 귀가 쫑긋했지만 캐묻지 않았다. 단순한 오해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듯 우리 아버지가 우리 앞에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신고한 이는 아버지와 형님 아우 하던 사람이었다. 물론 나도 잘 아는 아저씨였다.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중년 남자가 의심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걸 좋아하는 아버지였으니 술자리에서 별 뜻 없이 “이놈의 세상, 한 번 뒤집어져야 해”라는 식의 말을 했다면 그 말이 그의 심증을 굳혀주었을 수도 있다. 아저씨는 물론이고 나 또한 어려서부터 반공교육을 받아왔다.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반공정신이 투철했고 간첩 신고 보상금도 필요했다.
김원일 선생의 장편 <푸른 혼>을 다시 읽게 된 건 간첩조작 사건 때문이다. 민청학련 사건 희생자들의 얼굴을 보게 된 건 한참 뒤였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이라는 지시에 따라 그분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씩 맞춰보았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하재완, 이수병, 우홍선, 여정남. 희미한 흑백사진 속 얼굴들은 아버지의 얼굴과 아버지를 간첩으로 신고했던 아저씨의 얼굴과 비슷했다. 한 가정의 가장 얼굴이었다.
불현듯 고무줄을 당겨 쏜 듯 따갑던 감각이 떠올랐다. 어두운 골목, 창밖에 붙어서 방 안의 동정을 살피는 남자. 사람 좋아 보이던 그 아저씨는 언제부턴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그 작은 방에서 아버지는 어떤 일들을 했을까. 아저씨의 눈에 아버지는 어떤 수상쩍은 일들을 벌였을까. 그리고 나는 어떤 아이로 그에게 비쳤을까. 그는 일 년 넘게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저씨의 눈빛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어둡고 깊은 동굴 같던 눈빛.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아버지는 농담으로라도 그때 일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는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들에 대해 생각한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오랫동안 그들의 가족에게 따라붙었다. 부를 상징하고 귀신을 쫓는다는 빨강이 누군가에는 공포의 색이 되어 월드컵 경기 때 광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 티셔츠에도 섬뜩해져 텔레비전을 끄게 하기도 한다.
작가의 말에서 김원일 선생은 “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되었고 한국의 엄혹한 정치적 상황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관망하게 되었다”고 했다. 제목은 책에서 인용한 ‘한스러운 피, 흙 속에서 천년토록 푸르리라’는 이하의 시에서 따온 듯하다. 피의 붉은색은 변하지만 혼의 푸름은 바래지 않을 것이다. 2007년, 32년 만에 사형당한 8명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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