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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자연 그대로의 자연공원으로 / 김병익

등록 2014-03-20 19:08수정 2014-03-21 16:34

김병익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
5년 전 한-중 작가회의를 위해 중국 서북부의 칭하이(청해)성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란저우(난주)에서 시작된 버스길이 한없이 이어지면서 나는 암울한 심정을 달래야 했다. 달려도 달려도 멀리 보이는 산이며 들은 거칠었고 더러 가까운 언덕은 험한 바위와 흙산이었으며 황하는 말 그대로 누런 황톳물이었다. 사막일 듯 아득한 흰 띠가 띄는 것 외에는 불모의 돌밭과 나무 없는 들판 모든 게 잿빛이고 메마른 풍경들이어서 이색적이라기보다 말 그대로의 황야였다. 이런 황막한 오지라면 <서유기>의 삼장법사 일행이 천축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별의별 괴물들과 싸움판을 벌일 것이 당연하리라. 회식 때 나는 앞자리의 중국 작가에게 말을 건넸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들어오면서 우리는 한글을 만들어주신 세종대왕에게 감사를 드렸는데, 이 청해 땅을 돌아보니 자손들의 살터로 금수강산을 점지해주신 단군왕검에게도 감사를 드려야겠다.” 중국 작가는 느긋한 웃음으로 내 말을 수긍해주는 듯했다.

5년 전 찾은 중국 칭하이성의 황야가 떠오르면, 혹사당한 우리 땅은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안쓰러웠다.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습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다”고 쓴 박완서의 노후의 정서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통역을 통한 내 말에는 다분히 아름다운 내 나라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서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그리고 그 이후 내내, 내가 한 말들의 바닥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희미한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내가 헛말을 한 것은 아닌지, 저 대륙적인 관대함 앞에서 경망하게 촐싹인 것은 아닌지 부끄럼이 스멀거리는 것이다. 먼저 든 내 멋쩍은 의아심은 저 황폐해 보이는 땅속에 어떤 자원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중국은 갖가지 자기 것들은 숨겨둔 채 아프리카로 남미로 자원 외교를 하며 미래 산업에 사용될 자산을 확보해둔다는데, 이 황야를 파 보면 마치 아라비아 사막에서 석유가 뿜어져 나오듯 어떤 광맥이 솟아날지 모를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그 여행 다음해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열도 충돌 때 여지없이 확인했다. 중국인들이 ‘댜오위다오’로 부르는 이 섬 연안에서 불법 조업하던 중국 선원을 일본 당국이 체포하자 중국은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중단한다고 발표했고 일본은 다음날 그 선원들을 즉각 석방했다. 김동환의 <희토류, 자원전쟁>에 따르면 각종 전자산업에 감초처럼 사용되며 ‘현대산업의 비타민’으로 불리는 희토류는 중국에서 전세계의 97%를 생산하는데 이 부근 신장(신강), 티베트 등 험난한 자갈투성이 땅이 중요 출토지였다.

거친 땅에 숨은 자원들에 대한 내 두려움에 이어 들어온 생각은 그와 전혀 어긋나게, 그것들이 지닌 자연 그대로 불모지 같은 전경이었다. 물론 마을들도, 작은 공장도 있고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목초지도 보였지만, 그 모든 것들의 전반적 인상은 거친 들판과 칙칙한 언덕들, 험상궂은 바위들과 자갈들이 주는 황야였고 그것들은 자연의 거대함, 중량감, 적막의 이미지를 품고 있었다. 문화는 있지만 문명은 보이지 않고 삶을 살고 있지만 근대적인 생활은 아닌 듯했다. 자연은 여전히 원래의 자연 그 상태로 존재하고 있고 보이는 사람들이나 집들은 그 자연의 한 부분으로 천연스레 자리한 것으로 여겨졌다. 몽골식 게르에서 환영 행사를 보기도 하고 초원의 로지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했지만, 그 행사들이 관광이나 여행이란 사치스런 어휘로 남는 것이 아니라 거친 자연의 버려진 땅으로 가라앉혀지는 원초로의 회귀 체험을 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못살아도 풍성하고 아기자기했던 옛 농촌 고향을 떠올려주는, 그러나 오늘의 한국에서는 되살리기 힘든 토착의 세계를 회상시켜주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 속으로 묻히는 듯, 거칠고 불모지 같은 들판, 초라하고 앙상한 초목들, 윤기 없이 침묵하는 누런 산, 세상이란 게 이처럼 험난하고 냉정하다는 걸 실감시켜주는 비정한 풍경과 영원한 침묵에 싸이는 전율이었다. 그것은 아기자기 예쁘고 부드럽고 윤택한 우리 ‘금수강산’의 풍경과 전혀 달랐다. 진실로 나는 우리에게 아름답고 따뜻한 땅을 점지해준 단군왕검께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한두해 지나며 어쩌다 그 불모의 황야가 문득 떠오르면, 왁자지껄 빈자리 없이 파며 깨고 세우며 뚫고 내리찧으며 벗기고 덮어씌우며 세우는 등, 빈틈없이, 쉼 없이 당해온 우리 한국 땅의 수난이 안타까워 보이기 시작했다. 땅 위의 빌딩이며 땅속의 터널들, 강 위의 다리, 바다의 쓰레기 따위로 들쑤셔지고 더럽혀지며 산은 나무들이 무참히 베어진 자리에 골프장이 들어서는 등 어디 한군데도 그냥 놔두는 곳이 없으니, 정말 우리 땅은 곳곳이 아파 편한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아졌다. 그건 지구와 생명체와의 유기체성을 강조하는 제임스 러블록이 말하는 가이아를 넘어, 지구 자체를 거대한 유기체로 보는 원초신앙으로서의 ‘대지모신’(大地母神)을 마구 괴롭히고 훼손하는, 물릴 수 없이 큰 패륜의 죄를 저지르는 짓이었다. 우리의 이런 개발 아우성은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여서 모자란 땅을 넓히고 높이며 물속과 산속 등 손길 닿는 모든 곳들을 건설, 건립, 건조하며 급박하게 산업화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탓이라고 양해하고, 그 덕분에 미국의 1% 남짓한 우리나라 좁은 땅을 팔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땅 4분의 1을 살 수 있는 높은 ‘부동산 가격’을 대견해하면서도, 그러노라 마구 강요, 착취, 혹사당한 우리 땅은 얼마나 아프고 힘들고 괴로웠을까, 안쓰러워지는 것이었다.

이런 내 감정의 쏠림 때문에 찾아 읽은 것이 에드워드 애비의 <태양이 머무는 곳, 아치스>였다. 유타주의 자연공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거대한 조용함, 시간이 정지되고 현재가 끝없이 계속되는 듯한 압도적인 평화”(아아, 적막이 공원의 미덕인 것을!)를 누리며 적은 이 수기에서, 황의방의 유려한 번역으로 애비는 이렇게 쓴다: “황야라는 말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과거와 미지의 세계, 우리 모두의 고향인 대지의 자궁을 암시한다. 그것은 잃어버렸으면서 아직 있는 어떤 것, 외지면서도 동시에 아주 가까이 있는 어떤 것, 우리를 초월한 무한한 어떤 것을 뜻한다.” 내가 칭하이 일대의 드넓은 황야와 초원에 애틋한 미련을 두게 된 연유가 여기에 숨어 있었던가. 여기서 문득 우리 정부가 제안한 ‘비무장지대의 공원화’에 이런 거대한 침묵의 자연,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지켜질 수 있을까 염려되었다.

이 디엠제트는 인위적으로 인간과 생활이 철수하며 60년 시간 속에서 자연으로 되돌아간 독특한 생태 환경으로, 우리 역사의 아름다운 상처이자 단 하나 남은 자연 그대로의 벽감 같은 자리이다. 동강을 청정지역으로 보존한다며 오히려 심하게 어지럽혀 놓았듯이 이 청정지역의 공원화가 혹 북한산 산길처럼 부산스럽고 시끄러운 놀이터가 되지 않을까.

나는 박경리 선생 작고 후, 생전에 선생이 손수 일군 마당을 ‘토지공원’으로 만든다며 마구 파헤치고 흙과 돌을 옮겨 소설 <토지>의 미니어처 공간으로 뒤엎은 걸 무척 섭섭해하면서,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우면 부드럽고 편안하고 흙 속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꼼지락대는 것 같은 탄력이 느껴진다.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습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다”며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고 쓴 박완서의 노후의 정서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지방도시에서 성장했고 서울에서 살았으며 신도시에서 노년을 보내노라 자연생활 경험은 거의 없는데도 내 정서가 이리된 것은, 자연을 자연 바로 그것과의 인연으로 따뜻하게 사려두는 덕성을 피우던 그분들의 ‘만년의 양식’에, 나도 나이만으로나마 가까이 다가간 때문일까.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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