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논설위원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그리스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가 터뜨리는 분노는 트로이아의 전쟁터를 다 태워버릴 듯 맹렬하다. 첫 장면에서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자신을 모욕하자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의 목을 쳐버리겠다며 칼집에서 칼을 뺀다. 이때 여신 아테나가 급히 하늘에서 내려와 아킬레우스의 금발을 등 뒤에서 확 잡아당긴다. 같은 편끼리 싸우다 전쟁을 망칠 건가! 그 순간 아킬레우스는 칼을 물리고 노여움을 삼킨다. 아테네는 지혜의 여신이므로 이 장면은 아킬레우스의 마음속에서 지혜의 힘이 일어나 분노의 불길을 제압했음을 뜻한다. 이성의 분별력이 원시적 정념을 이겨내는 이 첫 장면은 인간 정신이 한 단계 도약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분노를 노래하는 <일리아스>는 분노의 다스림에 관한 시이기도 하다.
비이성적인 원초적 충동을 정신의 힘이 제어한다는 이 이야기는 400년 뒤에 좀 더 정교하게 변형돼 플라톤의 저작 속으로 들어온다. <파이드로스>에서 플라톤은 우리 영혼을 한 사람의 마부와 두 마리 말로 이루어진 쌍두마차에 비유했다. 마차를 끌고 달리는 두 마리 말 가운데 오른쪽은 좋은 말이고 왼쪽은 나쁜 말이다. 오른쪽 말이 명예와 절제와 겸손을 사랑하는 데 반해, 왼쪽 말은 방종과 오만으로 눈에 핏발이 서 있다. 오른쪽 말을 다스리는 데는 부드러운 명령으로 충분하지만, 왼쪽 말은 채찍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날뛴다. 오른쪽 말이 절도와 품위를 지키는 의지의 말이라면, 왼쪽 말은 쾌락의 대상을 뒤쫓는 욕망의 말이다. 마차를 모는 마부는 무엇이 좋은 것인지 분별하여 이끄는 능력, 곧 이성을 가리킨다. 나쁜 말은 욕망의 대상을 발견하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내달리는데, 여기에 마부의 이성이 지면 마차는 쾌락을 향해 질주하는 욕망의 불덩이가 되고 만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인간 영혼에 관한 설명은 국가에 관한 설명이기도 하다. 말과 마부는 국가를 끌고 가는 힘이다. 두 마리 말은 국가를 책임진 권력의 두 모습을 보여준다. 국가권력은 절제와 품위를 지키며 바른길로 나아갈 때 국민의 자유와 복지와 행복을 키우는 선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탐욕에 눈멀어 자제력을 잃으면 나라는 낭떠러지를 향해 돌진하는 마차 꼴이 되고 만다. 마차의 폭주를 제어하려면 마부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제구실을 해야 한다. 마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이끄는 것이 시민의 공공이성이며, 이 공공이성을 대리하는 것이 권력 감시자인 언론이다. 언론이 곧 마부다. 그런데 만약 언론이 타락해서 마부 노릇을 포기하고 날뛰는 말과 한몸이 된다면? 좋은 말이 나쁜 말과 같은 방향으로 뛰지 않는다고 오히려 채찍질당하고 학대받지 않겠는가. 마부가 나쁜 말과 하나가 돼 좋은 말을 쳐대는 상황이 지금 이 나라 언론-권력의 동맹 현실이다. 조중동·종편·지상파 방송, 이 괴벨스의 아가리들이 나쁜 말에 엉겨붙어 마차를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말과 마부 이야기를 하는 그 책에서 플라톤은 인간 영혼을 9등급으로 나누어 가장 높은 자리에 지혜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영혼을 두었다. 가장 낮은 단계의 두 번째, 곧 여덟 번째 자리에 배정된 것이 소피스트와 데마고그다. 가짜 지식을 팔아먹고 거짓 언어로 대중을 선동하는 자들은 거의 구제받을 길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이 나라 지배언론의 몰골을 여기서 본다. 그리고 아홉 번째,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티라노스, 곧 폭군이다. 폭력이 된 국가권력이 타락한 언론과 한몸이 돼 달리는 상황이야말로 최악이다. 이 난폭한 탐욕의 불덩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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