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정치 지도자는 말을 잘해야 하며 잘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국민을 완력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말로 설득하고 말로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담화 유형을 개설하고 청중과 다면적으로 깊이 접촉하며 경청하고 담화하는 능력은 민주적 지도력의 필수 요소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에 ‘노변정담’을 성공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루스벨트는 당시 보급되기 시작한 라디오를 통해 대통령 재임 중 30회의 노변정담을 했다. 경제 대공황을 뉴딜 정책으로 극복하기 위해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공식적이고 딱딱한 형식이 아니라 난롯가에서 친지들과 정담을 나누는 듯한 친밀한 분위기로 진행했다. 그 결과 대통령의 이야기는 가장 인기있는 쇼 프로그램보다도 청취율이 높았다고 한다. 첫 4년 동안 국민들한테서 2000만통 이상의 편지도 받았다고 하니, 일방적인 홍보가 아니라 소통 효과가 뚜렷했다.
사실 루스벨트는 이미 뉴욕 주지사 재임 때 농민·실업 구제 등 개혁 성향 법안의 주의회 통과가 어려울 경우에 라디오를 통해 주민에게 직접 호소했다고 한다. 당시 주민들은 신문과 무성영화 뉴스 화면에 비친 정치인 이미지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루스벨트가 그 벽을 깨고 주민들과 직접 소통한 셈이다. 루스벨트는 라디오가 막 보급되던 시대에 첨단 미디어 기술을 잘 이용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로 접어들어 지도자의 말하기 문화가 발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를 마련해 구제금융 위기 상황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민의 이해와 참여를 요청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 ‘대학교 방문, 학생 상대 특강’ 방송사 토론 프로그램 출연 등 말하기 유형을 다양화했다. 글을 써도 딱딱하고 공식적인 담화문보다는 ‘한일 관계와 관련해 국민에게 드리는 글’ ‘청남대에서 국민에게 드리는 편지’ ‘이기명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와 같이 친근감을 주는 형식을 선호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얼마 전 취임 1주년을 맞아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담화문 형식으로 발표했다. 문제는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는 것도 아니고, 원고지 97장 분량을 무려 41분 동안 ‘나홀로’ 읽어내려간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동영상을 다시 봤다. 박 대통령은 “공공기관 임직원이 퇴직 뒤 취업한 업체와 수의계약 금지” “상가 권리금 보장 장치 마련” 등 몇십개에 이르는 세부 과제를 죽 나열했다. 프롬프터에 뜨는 원고를 약간의 손짓을 섞으면서 읽는데, 가짓수가 하도 많으니 뭐가 중요한 건지 종잡기가 어려웠다.
대통령은 실수도 여러 차례 했다. “경제를 혁신하는 과정에서”라고 해야 할 것을 “경제를 확산하는”이라고 했고, “규제를 혁파해 나갈 것”이라고 할 것을 “규제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거꾸로 말했다. 이밖에 “청약자격”은 “청약가격”으로, “적극적으로”를 “전국적으로”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통령 자신도 가닥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는 연설을, 누가 보라고 텔레비전 생중계를 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말하기의 취약함은 ‘말뿐’에 그치지 않았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 가운데 집주인들한테 세금을 더 걷겠다고 한 월세 대책은 집주인들이 반발하자, 1주일 만에 수정됐다.
청중은 주의력을 기울이는 데 한계가 있다. 한 가지에 관심을 쏟으면 다른 여러 가지에 동시에 관심을 두기 어렵다는 점을 ‘관심 총량의 법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도자가 듣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욕심만 앞세워 일방적으로 떠드는 것은, 그동안 진화해온 말하기 문화를 크게 후퇴시키는 것이다. 이래서는 국정 효율성과 민주적인 소통 모두를 기대할 수 없다.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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