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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류근일 선생님께 / 호인수

등록 2014-03-07 19:03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안녕하십니까? 너무 오랜만에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가까이서 뵌 게 제가 명동성당 문화관에 무슨 심포지엄의 평자로 초청되어 우연히 선생님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았을 때니까 벌써 10년은 된 듯합니다.

뜬금없이 편지를 드리게 된 사유는 이렇습니다. 몇 달 전에 전주교구의 시국미사 도중 박창신 신부의 강론이 우리 사회에 큰 이슈가 된 후로 이른바 ‘종북사제’란 신조어가 생겨났고 각 교구가 돌아가면서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대수천)이라는 어르신들이 미사가 봉헌되는 성당마다 모여들어 종북사제 물러가라고 온통 난리입니다. 마치 한국천주교회가 매국교회와 애국교회로 갈라져 피 터지게 싸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웃지 못할 일련의 사태를 답답한 심정으로 지켜보다가 문득 류근일 선생님이 떠오른 겁니다. 이럴 때 당신은 무슨 생각, 무슨 말씀을 하실까 궁금해졌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6년부터 근 2년간 제가 부천 소사성당에서 부제와 보좌사제로 재직 중이던 때였습니다. 우리 성당 신자이며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셨지요. 주일날 미사가 끝나면 일부러 저에게 오셔서 강론에 대한 간략한 평을 해주셨는데 어쩌다가 준비가 좀 소홀했다 싶을 때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조용히 일침을 가하셨습니다. “신부님, 공부할 시간이 없으셨나 봅니다.” 그럴 때면 머리털이 주뼛 서는 걸 느끼며 쥐구멍을 찾아야 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그렇게 단련시키셨습니다.

회사로 저를 부르신 적도 있었지요. 초짜 사제인 저를 데리고 편집국이며 논설위원실을 두루 돌며 많은 분들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창비’에 가서 이름만 듣던 기라성 같은 평론가와 시인, 소설가들을 만나게도 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고 편협하기만 했던 저는 다방면에 눈을 뜨고 교제의 폭을 넓혀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고마운 은인을 만난 행운아였습니다.

기억하십니까? 80년대 초, 전두환이 광주학살 후 대통령이 되어 ‘새 시대, 새 인물’을 내세울 때입니다. 당신이 인천의 고잔동성당에 부인과 함께 놀러 오셔서 하셨던 말씀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두환이 저를 부릅니다. 제가 거기에 응해서야 되겠습니까? 우선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얼굴을 알리라기에 마침 앓던 어금니를 빼고 솜을 물고 죽는 시늉을 하며 거절했습니다.” 부인은 제게 봉투를 하나 건네면서 우리 남편이 감투 쓰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세상에나! 하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하지 않게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저는 난생처음 들어봤습니다. 류근일 선생님, 당신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포털사이트에서 류근일을 찾았습니다. 바로 사진이 뜨는데 많이 연로하신 모습입니다. 저도 환갑이 넘은 지 오래니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선생님은 <조선일보>와 <뉴데일리>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종교인이 아닌 ‘종교부문 운동가’로 규정하고 그들이 아무리 신자들을 현혹하더라도 애국국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교회 당국이 못하면 평신도들이 나서서 논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더군요. 이미 오래전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갑자기 연락을 끊으시고 명동에서 인사도 없이 서둘러 가신 까닭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큰맘 먹고 조심스럽게 여쭙니다. 선생님도 누구처럼 연세 드시면서 도무지 통하지 않고 알아주지도 않는 옛 동지들에게 거듭 실망해서 등을 돌리셨습니까? 아니면 제가 아둔해서 애당초 보수 논객의 실상을 몰라보고 마음 내키는 대로 판단한 것입니까? 가족 모두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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