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무 스포츠부 선임기자
안현수가 쇼트트랙 남자 3관왕에 오르며 국민적 영웅이 됐던 2006년 2월 토리노 겨울올림픽 이후 일이다. 그해 4월4일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2006 세계쇼트트랙대회에 출전한 한국선수단 귀국 환영식이 열렸는데, 남자 개인종합 1위를 차지한 안현수의 아버지가 소란을 피운 것이다. 그는 김○○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에게 아들이 다른 파벌의 선수들로부터 경기 중 방해를 받았다며 욕설을 퍼붓고 얼굴에 손찌검까지 했고, 둘 사이에 볼썽사나운 장면이 연출됐다. 옆을 지나가던 안현수는 이 장면을 힐끗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 한국 쇼트트랙계 내부는 한체대와 단국대 등 비한체대 출신들의 파벌싸움이 극에 달해 있던 때다. 세계대회를 앞두고서도 두 파벌 출신 코치들의 지도 아래 선수들이 각각 나뉘어 훈련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번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그런 안현수가 빅토르 안으로 변신해 다시 올림픽 3관왕에 오르며 러시아의 영웅이 됐다. 한국민들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안현수 아버지가 소치에서 신문 방송과의 잇단 인터뷰를 통해 아들은 파벌싸움의 희생양이고, 전○○ 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악의 축’인 양 성토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들끓었다.
그러나 한체대 출신인 안현수는 전 부회장이 발굴해 키워낸 선수이고, 특혜까지 받았던 사실도 드러났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 때 대표팀 예비명단에도 끼지 못했지만,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전 부회장이 추천해 올림픽 무대를 밟게 했다는 것. 안현수는 ‘한체대 대학원에 진학하라’는 전 부회장의 권유를 뿌리치고 2007년 말 거액(계약금 2억원, 연봉 1억원)을 받고 성남시청에 입단하면서 스승과 사실상 갈라서게 된다. 안현수는 이듬해 1월 태릉선수촌 국가대표 훈련 중 펜스에 부닥쳐 왼무릎에 큰 부상을 당했고 이후 4차례 수술을 거듭한다. 설상가상으로 성남시청 팀이 해체되면서 둥지를 잃게 된다. 그런 그를 받아줄 팀은 하나도 없었고, 스승도 외면했다. 그래서 러시아행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안현수는 소치 올림픽 경기를 모두 마친 뒤 공식 기자회견에서 “파벌싸움이 있기는 했지만 러시아로 귀화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라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 운동을 정말 하고 싶었고, 나를 믿어주는 곳에서 마음 편히 운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해 불편한 심기도 드러냈다. “파벌에 대해 아버지께서 너무 많은 인터뷰를 하셨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많이 부풀려졌다. 아버지가 나를 너무 아끼는 마음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피해를 보는 부분이 있었기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
소치 올림픽을 통해 다시 불거진 안현수 귀화 문제는, 자기 자식만 생각하고 경솔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부모들, 파벌싸움에 눈이 멀어 선수들은 안중에도 없는 몰지각한 지도자들, 그리고 이런 것을 방치해온 빙상경기연맹 실세들이 만들어낸 총체적 난맥상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속에서 선수들은 멍들 대로 멍들었다. 안현수 말대로 ‘선수들한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가?’
한국 쇼트트랙은 세계 최강이어서, 선수들은 올림픽 무대에 나가기만 하면 메달을 따낼 수 있고, 각종 포상금과 명예 등 엄청난 혜택이 돌아온다. 그런 속에서 빙상경기연맹 실력자들의 비리가 생겨나고, 선수 부모들의 과욕과 다툼도 생겨난 것이다. 안현수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러시아라는 돌파구를 찾아내 큰 부상을 딛고 2차례 올림픽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영웅이다. 그의 인간승리에 박수를 보낸다.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선수들이 어른들의 탐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운동만 할 수 있는 훈련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김경무 스포츠부 선임기자
kkm10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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