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한때 ‘오빠 한번 믿어봐’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제목인지 가사의 일부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도 흥얼거린 것을 보면 그 가사에 담긴 뭔가가 마음을 끌어당긴 것만은 분명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오빠 한번 믿어보라고 말하며 든든한 어깨를 내밀어 주고 하늘에서 별도 따다 주고 너만 바라보고 살겠다 하는 말을 허언으로라도 해주는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잠재의식 속에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의 젊은 남녀들 사이에는 오빠를 믿지 말라는 말이 유행이다. 남자를 못 믿겠다는 여자들의 한숨 섞인 독백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사귄 지 1년, 2년, 5년이 지나 여자는 속절없이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남자들은 결혼의 기역 자도 꺼내지 않아 은근슬쩍 말을 꺼내면 ‘오빠를 믿지 말라’는 대답이 나온다고 한다. 내 한몸 추스르기도 힘든데 어떻게 결혼을 하겠느냐, 어디서 살 것이냐,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며 지금 그대로가 좋다고 한다는 것이다.
결혼 전 동거에 대해 젊은 세대는 60%가 괜찮다고 대답하고 있다. 단순히 요즘 젊은이들의 성의식의 변화라고 보기보단 절박한 사회경제적 환경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결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혼해도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부모들이 재촉하면 누가 아이 낳는 방법을 몰라서 안 낳느냐, 아이 낳으면 아이를 키워주겠다는 각서를 써주겠느냐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래서 연상의 여자들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우스 허즈번드를 자청하며 꿈꾸며 ‘누나 한번 믿어봐’라고 해줄 연상의 빵빵한 여자들에게 눈길을 돌리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어찌 보면 사회경제적인 현상으로 인해 문화와 결혼 풍속이 오히려 남녀평등 쪽으로 바뀌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못생긴 거, 뚱뚱한 거는 용서해도 직업 없는 여자는 아내로서 절대 용서가 안 되는 세상이다.
사람은 어쨌든 시간과 공간의 산물이다. 이 사회에서 보통의 부모 덕 기대할 것 없는 젊은이들이 누릴 수 있고 해볼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는 미래는 너무나 제한적이다. 개천에서 용이 태어날 수 없는 것은 이미 옛날이야기고 개천에서 미꾸라지로라도 살아남기가 어려워져서 몸부림치는 것이 보인다. 거미줄에 걸려 있는 것처럼 움치고 달리려 해도 출구를 찾을 수 없다. 과거엔 아이를 임신하면 그것으로 남녀관계의 해결점이 찾아졌지만 요즘은 임신은 젊은이들 사이에선 사고로 치부되고 있는 게 또 다른 진실이다. 어느 누구도 아이를 가졌다고 결혼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 판교에 있는 엔씨소프트의 사옥으로 견학을 갔다. 1층 가장 양지바른 곳, 공원 앞에 유치원이 있었다. 두살부터 일곱살까지의 직원 아이들 200여명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회사 관계자는 직원들의 복지시설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곳이 유치원이라며 젊은 인재를 끌어오기 위해선 아이들 육아문제 해결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했다고 한다. 꿈같은 환경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꼼꼼히 배려된 시설을 돌아보며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이런 혜택이 돌아가게 할 수는 없는가라는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신과 출산·육아·교육은 더 이상 개별 가정의 문제일 수는 없다. 아이가 축복이라기보다는 발목을 잡는 불모의, 불임의 사회다. 전 세대의 부모들은 둘만 낳아 등이 휘도록 키워 자녀들을 세상에 내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기대대로 우리 사회의 선순환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젊은 세대들의 책임은 아니다. 미래학자들이 꼽는, 빈익빈 부익부의 심화로 인한 균등한 기회의 봉쇄, 새로운 고용창출의 부재로 인한 사회의 침체, 미래세대와 노인세대 복지의 갈등이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늘 막 나온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서 3년 안에 160만개의 청년 여성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되어 있다. 한숨이 나온다. 여기저기 허겁지겁 꿰매 맞추었을 뿐 10년 뒤, 20년 뒤에 우리 사회에 닥칠 위기를 돌파할 어떤 밑그림도 보이지 않는다. 육아와 교육·주택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보다 일시적인 경기회복을 도모하려는 임시방편의 정책들만 눈에 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인생의 새로운 장이 펼쳐진다는 설득을 할 염치가 없다. ‘정부 한번 믿어봐’라는 신뢰감을 주는 정부를 못 가진 미래세대들이 가엾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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