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1999년 화성 씨랜드 참사가 있던 그해, 우리 아이도 여섯살이었다. 며칠 뒤에 있을 여름 캠프 준비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배낭을 싸고 풀었다. 아이는 엄마와 떨어지는 것에 겁을 내면서도 엄마가 좋아하는 게를 잔뜩 잡아 오겠다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불안하기로 치면 나도 아이 못지않았다. 물을 갈아 먹고 탈이 나는 건 아닐까, 혹시나 게를 더 잡겠다고 일행에서 벗어나 물 깊은 곳까지 가면 어쩌나. 누군가 유난을 떤다고 할까 봐 입 밖으로 드러내놓고 걱정도 못했다. 한편 혼자 떨어져서 하룻밤 자고 오면 부쩍 커 있을 거라는 기대도 했다.
화마가 집어삼키는 건물을 보면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나도 모르게 내 아이 손을 붙잡았다. 아이의 온기가 전해졌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 아이가 내 곁에 있다 안도했지만 바로 그 이기적인 생각에 몇 갑절 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넋이 빠진 아이들의 부모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앉지도 일어나 있지도 못했다.
그해 여름 남아 있던 캠프들은 줄줄이 취소되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지만 나는 그 일이 잊히지 않았다. 그 참사의 현장이 떠올랐고 그곳에 나의 어린 딸이 가 있는 상상을 했다. 그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단편 <별 모양의 얼룩>을 쓴 건 그 때문이었다. 잊고 싶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었다. 단편을 발표한 그해 봄, 우리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살아 있었다면 그 아이들도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것이다.
문득문득 아이와 동갑인 그 아이들이 떠올랐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같은 날이기도 했지만 우리 아이가 여드름투성이가 되거나 이유 없이 화를 낼 때도 그랬다. 그사이 나라를 떠난 부모도 있었다. 아이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하는 이 나라에 더 머물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가끔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진짜 죽은 것은 다릅니다”라고 말했던 한 아빠의 음성과 함께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닐, 남아 있는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참사 소식에 15년 전 그 참사가 떠오른 건 조립식 샌드위치 패널 때문이었다. 그날 그 화재를 참사로 키운 것 중 하나인 그 패널이 여전히 쓰이고 있다는 것에 분노했다. 한둘도 아니고 수백명을 수용하는 대형 건물을 지으면서 화재뿐 아니라 하중을 견디는 힘도 약한 그 재료를 쓴 건 분명 비용 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에는 폭설이 쏟아졌다. 인근 도시의 한 공장도 폭설로 무너져 고등학교 실습생이 숨졌다. 그런데 누구 하나 폭설이 쌓인 체육관 지붕을 의심하지 않았다.
희생자 대부분이 우리 아이 또래였다. 15년 전 그 참사로 동갑인 아이들을 떠나보낸 바로 그 아이. 그곳은 시작의 자리였다. 입시 지옥에서 간신히 해방된 아이들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을 내딛는 자리였다. 나는 그 아비규환 속에 내 아이를 또 데려다 놓는다.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체육관이 웅웅거린다. 수백명의 아이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훈김으로 체육관 안이 조금씩 달아오른다. 학과 소개를 하면서 처음 접하는 언어를 발음해보고 누구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을 것이다. 설렘과 기대 그리고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었을 그들의 미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앞의 이익에 리조트와 공사를 맡은 이들이 눈 한번 질끈 감은 그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에 무너졌다.
<별 모양의 얼룩>을 발표했을 때 누군가 재난의 상상력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하지만 재난의 상상력이 아니다. 아이를 잃는 꿈을 꾸는 어머니의 공포다. 아이들을 지키려는 안간힘이다. 내 아이는 살아 있어 혹시나 당신의 그 고통을 잠깐이라도 잊었을 수 있던 자의 죄책감이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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