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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망국을 기념하는 뜻

등록 2005-09-06 18:43수정 2005-09-06 18:43

이인우 사회부 교육팀장
이인우 사회부 교육팀장
아침햇발
지난달 29일은 95년 전 대한제국(조선)이 일본제국(일본)에 넘어간, 이른바 ‘경술국치’ 날이다. 여야의 뜻있는 젊은 정치인들은 다시는 망국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교훈으로 삼자며 기념일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날을 잡아 친일파 3090명의 명단을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일 것이다.

역사상 우리 민족이 망국의 난을 당한 것은 크게 보아 여섯 번이다. 이 가운데 외세에 의한 망국은 옛조선(서기전 108년) 백제(서기 660년) 고구려(668년) 조선(1910년) 네 차례였다. 신라(935년)와 고려(1392년)는 각각 병합과 역성혁명 형식으로 신흥세력에게 사직을 넘겼으니 민족 내부의 왕조 교체였다. 나라 대 나라의 형식으로 합병이 된 사례는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 이래 경술국치가 역사상 두 번째 일이다.

망국은 망국의 형식에 따른 망민을 낳는다. 정복당한 백제와 고구려는 왕을 비롯해 귀족, 주민들이 수만에서 수십만 명씩 중국으로 끌려갔고, 그에 버금가는 수의 사람들이 일본과 북방지역으로 망명해갔다. 고려는 왕실이 사실상 절멸당했다. 반면 병합을 자청한 신라의 지배층은 대부분 고려 지배층으로 편입됐다.

신라처럼 정복이 아니라 합병에 의한 망국을 택한 조선은 어떠했는가. 왕실은 일본의 돈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매국세력은 엄청난 은사금과 관작을 받았다. 서민들은 왕실을 대신한 일제 총독부의 지배를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조선 인민들은 경술국치 9년 후에 대규모 독립운동을 벌이지만, 그로부터 21년 뒤에는 일제의 창씨개명 요구에 전체 인구의 약 80%가 응하고 있다. 가혹한 수탈과 계급차별에 놓여있던 사람들에게 근대식 교육과 제도에 의한 지배는 민족의식보다는 순치와 동화의 자력을 더욱 크게 작동시켰을 것이다.

그 역사로부터 겨우 60년이 지났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축은 여전히 외세의 지배를 직접 체험하거나, 그들로부터 교육받은 2세, 3세들이다. 그 말은 우리가 아직은 망국의 문제를 역사 속으로 완전히 밀어버릴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체험세대가 스스로 친일문제를 청산하지 못했기에 망국을 반추하는 것은 역사적 행위인 동시에 현실적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조부의 친일행적을 사죄한 한 원로 교사의 고백은 용기있는 일이었다. 이 교사의 용기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생각을 해본다.

개인적으로 합병의 치욕을 기억하는 데는 두 가지 방향성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고 본다. 첫째는 악질적인 매국세력에 대한 추적은 역사가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며, 두번째는 그런 한편으로 망국민들이 살아가기 위해 한 선택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뇌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세의 지배가 피지배 민족에게 남긴 가장 아픈 상처의 퇴적은 무반성적 합리화, 위선적 애국심, 윤리적 도피 등 역사가 개인에게 강요한 마음의 이중성이라고 생각한다.


8월29일을 망국 기념일로 삼자는 의견에 동의한다. 그날 하루만이라도 매국과 애국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망국과 망국민의 현실을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는 반성풍토가 자리잡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매년 8월29일은 진짜 친일파들과 그들의 반성하지 않는 후손들만이 침묵하는 날이 되지 않을까.

이인우 사회부 교육팀장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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