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로버트 게이츠 전 미국 국방장관이 회고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좀 제정신이 아닌’ 인물로 묘사했다. 게이츠는 노 전 대통령이 아시아 안보의 최대 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라고 말했다고 적었다. 이 말이 꼭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미국의 가공할 군사력, 무소불위의 태도 등을 고려하면 그렇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이 미국 국방장관한테 당신들이 최대 안보위협세력이라고 꼬집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 대목에선 게이츠가 노 전 대통령 말을 오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북핵 대응을 둘러싼 줄다리기 과정에서 구사한 직설화법일 테지만 가벼운 언행이다.
근래의 한국 외교를 보고 있으면 참 종잡을 수 없다, 가볍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정치가 가벼운 탓일까, 한국 외교는 중심이 없다. 약소국의 가벼움일까, 이리저리 쏠리면서 무언가 방향을 잡지 못한다.
노 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도 그렇다. 사실 균형자론은 전통적인 미국 중심의 사대외교를 중국 쪽으로 조금은 틀어보자는 것이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말을 앞세워 섣부르게 추진하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라 안팎에서 제대로 컨센서스를 이루지 못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들어서더니 외교가 180도 바뀌었다. 중국과는 다시 찬바람이 일었고 미국에 달려가 안기기 바빴다. 햇볕정책은 폐기됐고 이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안 한 것도 성과라고 강변했다.
이 전 대통령 외교의 가벼움을 드러낸 사건은 2012년 8월의 독도 방문이었다. 그 일로 독도 문제를 영토분쟁화 하지 않고 실효적 점유를 이어간다는 우리 외교의 기본틀이 무너졌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무성의를 질타하기 위한 방문이었지만 외교적으로 역효과만 낳았다.
퍼스트레이디 경험이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가. 애초 기대와는 달리 외교가 보이질 않는다. 원칙을 강조한 탓일까, 누구하고도 외교다운 외교를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미국과 잘 지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을 제대로 끌어들인 것도 아니다. 일본과는 외교랄 게 없는 상황이다. 돌파구로 삼아야 할 북한과의 관계에선 꿇고 들어오라는 식의 강압외교를 되풀이한다.
대일 강성외교 역시 어떤 전략적 목표를 두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대통령이나 외교장관이 별다른 출구전략 없이 일본을 밀어붙일 뿐이다. 외교는 없고 보수 여론을 의식한 퍼포먼스나 과거회귀적 군사주의만 넘쳐난다. 전략적 고려가 없는 즉자적 외교는 가볍다.
한국 외교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왔다갔다하는 것은 결국 정치체제가 가볍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치인 셈이다. 경제건 외교건 정치가 중심이 잡혀야 흔들리지 않고 나아간다. 중국 지도부가 오랜 세월 덩샤오핑의 ‘도광양회 유소작위’(실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되 할 바는 한다) 외교전략에 따라 나라를 키운 것이 대표적이다.
선거에 이겼으니 5년 동안 외교도 멋대로 하겠다고 하면 나라의 토대가 흔들린다. 대통령 단임제로 인한 일인정치, 제왕적 정치의 폐해가 외교에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이 바뀌면 외교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180도 돌변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왔다갔다하고, 일본에 대해서도 실익 없는 가벼운 외교를 계속한다.
국가의 외교안보 정책을 대통령 한 사람이 쥐락펴락하는 현실로는 나라의 백년대계를 갖추기 어렵다. 외교도 분권화돼야 한다. 누가 나라를 맡든 외교가 중심을 잡고 차분히 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승자독식이 아니라 합의의 정치가 돼야 한다. 제대로 된 외교를 위해서라도 정치체제의 분권화, 즉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로의 전환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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