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조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저자
야! 한국사회
우리가 경험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군사 독재의 공통점은 경제적 성과가 정치적 죄악을 압도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정치적 죄악이 실은 경제적 성과의 비용일 뿐이고 그 비용조차도 경제적 성과에 비하면 미미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 지배로 조선 경제가 성장했다고 믿는 일본의 우익은 식민지 시절의 만행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는다. 독재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고 믿는 한국의 우익 역시 독재 시절의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가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고 과거사에 사과를 촉구하면서 한국 우익의 교과서가 경제적 성과를 들어 독재의 정치적 죄악을 합리화하자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한국 정부의 ‘자아성찰’과 ‘반면교사’를 촉구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한국의 독재를 바라보는 세계의 객관적인 시선이다.
워쇼스키 남매가 감독한 영화 <매트릭스>에서 지능을 갖게 된 컴퓨터는 인간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인간을 제압한 컴퓨터는 영양분이 채워진 캡슐 속에 인간을 넣어 관리한다. 머리에 케이블을 연결한 후 전기적 자극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과 동일한 신호를 주입한다. 그들이 제공하는 환상과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무차별하다. 환상은 현실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제 인간은 노력하지 않고도 원하는 모든 육체적 쾌락과 정서적 행복 그리고 인간적 성취를 맛볼 수 있다. 물질적 욕망의 잣대로만 본다면, 인간은 그 가상의 세계를 탈출할 아무런 인센티브가 없다. 많은 인간들이 비루한 현실 대신 캡슐 속에서 근사한 환상을 택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키아누 리브스는 자신의 삶이 실은 전기적 자극에 불과한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빨간 알약을 선택하는 순간 그는 차가운 현실로 나와 레지스탕스가 되어 투쟁하게 된다. 환상 속의 세상이 실재의 세계와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박차고 나오는 사람들은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란 환상과 실재에 대한 가치판단과는 상관없이 그것을 선택할 권리다. 자유를 선택하든 빵을 선택하든, 매트릭스 속에서 황제의 삶을 살든 매트릭스 밖에서 고단한 레지스탕스의 삶을 살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과 윤리와 정치에는 교집합이 있지만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우월하거나 포괄적이지 않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 같지만 법이 도덕이 아니며 법은 때로는 정치적 현실에 굴복한다. 1만명의 시위자에게는 법률을 위반하지 말라고 촉구할 수 있지만 100만명의 시위자에게 법을 지키며 시위하라고 말하는 자는 바보일 뿐이다. 하지만 정치는 실체가 불분명해서 궁극의 순간에는 도덕에 손을 내민다. 식민지 지배나 군사 독재는 표면적으로 법적 근거를 갖출 수 있고 상당한 경제적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정치적 지배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하며 윤리적 정당성을 상실한다. 법적 근거가 정치적 실효성을 확보할 수 없다. 식민지 지배나 군사 독재가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는 사회는 경제적 곤궁함 때문에 도덕적 타락이 합리화되는 곳이다. 시대착오이자 사회적 퇴행이다.
독재 정권의 경제적 성과를 통해 정치적 죄악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일본 식민지 지배의 정치적 죄악들을 합리화시킨다. 어렵게 얻은 정치적 자유를 포기할 수 없고 지정학적으로 민족주의도 버릴 수 없는 한국에서 그런 시도는 독배를 마시는 것 같다. 도덕적으로 부끄럽고 정치적으로 어리석다. 뉴라이트를 어떻게 버리는가에 보수의 미래가 달렸다.
김동조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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