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은 만인이 아는 바가 되었다. 박 대통령은 마땅히 응답해야 할 문제에 침묵하거나 딴청을 부렸다. 취임 1년이 다 되어 대국민 기자회견을 한번 했는데 그나마 각본 회견으로 흘렀다. 그는 내정과 대외 정책 모두에서 “비정상의 정상화” “(북한의 대화 제의는) 위장 평화공세” 등 극단적 대결 언어를 쓴다. 그런 언어는 민주적 공론 형성을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요즘 들어 야당인 민주당에서도 불통 논쟁이 붙었다. 정청래 의원은 엊그제 다음 아고라에 글을 올려 “민주주의 사회에서 말할 권리조차 억누르고 내부 입단속을 해야 할 정당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정당이다”라고 주장했다. 김한길 대표가 하루 전 “쓴소리 주실 의원들은 언제든 환영하지만, 지도부를 거치지 않고 에스엔에스에 개별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당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여당이 설령 권력을 갖고 구성원들의 입단속을 하더라도, 야당은 말의 성찬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어야 경쟁력을 인정받는 법이다. 야당에서 언로 봉쇄 시비가 나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사실 지난 13일 김 대표의 새해 기자회견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제2창당의 각오로 정치 혁신을 단행하겠다는 것은 좋은데, 그 방법으로 “소모적인 비방과 막말 금지”를 제시한 게 좀 그랬다. 정치에서 언어 순화라는 말은 순진하게 받아들일 게 못 된다. 야당의 정권 비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청와대와 여당, 친정부 언론들이 즐겨 갖다 붙이는 딱지가 ‘비방과 막말’이다. 그런 담론을 제1야당 대표가, 그것도 정치 혁신 처방이라고 제시했으니 야당 지도부가 제풀에 눈치를 보고 잔뜩 움츠러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새해 초에 박 대통령이 통일대박론을 대단한 기세로 들고나왔다. 통일대박론은 북한 붕괴 임박론과 일방적 흡수통일론에 기댄 까닭에 평화를 해칠 염려가 크다. 제1야당이 마땅히 비판하고 나설 문제였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거의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대신에 민주당은 엉뚱하게도 햇볕정책을 수정할 것처럼 나서다가 반발이 일자 허둥지둥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1야당이 정작 중요한 국가적 현안에는 개입하지 않고, 누가 묻지도 않는 해묵은 문제를 붙들고 집안에서 콩이야 팥이야 하고 있는 셈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거나, 대결적 언어를 구사한다. 권위주의적 불통의 전형적 사례다. 민주당 지도부의 문제는 권위주의나 폭력성은 아니다. 대신에 민주당은 여당과 친정부 언론들의 담론 공세에 눌려 여당의 프레임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게 문제다.
서울대 이준웅 교수는 고대 그리스의 레토릭 등 말하기 관련 고전을 토대로 ‘의사소통 민주주의’라는 이론을 세웠다. 그의 저서 <말과 권력>에는 그리스 도시국가 코린토스의 참주인 페리안드로스가 밀레투스의 참주인 트라시불로스한테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전수받고 싶어 사자를 보낸 일화가 나온다. 사자한테 비결을 질문받고 트라시불로스는 말없이 보리밭으로 나가 가장 높이 자란 이삭들을 베어버렸다고 한다. 절대권력자라면 필요할 때 폭력을 행사하면 되는 까닭에 굳이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의 이론을 다소 거칠게 압축한다면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공중 앞에서 경쟁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그 의견을 들은 자들이 최종적으로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일종의 연행적 경연과 같이 활기차게 전개될 때 민주주의가 잘 작동한다”는 이야기다. 대통령과 야당이 요즘처럼 소통 빈곤의 문제를 계속 드러낸다면 민주주의가 실패하기 쉽다.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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