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2일 오후(현지시각)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제44차 세계경제포럼(WEF·일명 다보스포럼) 연차총회에서 ‘창조경제와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개막연설을 하고 있다. 다보스/연합뉴스
[시민편집인의 눈] ‘여론조사 정치’의 함정
박 대통령 지지도 조사 17%만 응답…83%의 생각 반영 안 돼
‘허상’이 지배하는 정치는 위험…‘한겨레’가 주목해야 할 대목
박 대통령 지지도 조사 17%만 응답…83%의 생각 반영 안 돼
‘허상’이 지배하는 정치는 위험…‘한겨레’가 주목해야 할 대목
무척 궁금했다. 무엇이 박근혜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을 떠받치는 힘일까. 취임 이후 박 정권은 줄곧 50%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터다.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먹통정권’, 대선 때 국민과의 약속을 뒤집는 ‘부도정권’, 창조적 기풍보다는 40년 전 ‘유신’의 기운이 감도는 ‘복고정권’, 성직자의 진지한 충고에도 ‘종북 딱지’ 붙이기 마다하지 않는 ‘종북정권’, 법과 원칙을 외치며 민주노총과 언론사를 유린한 ‘무법정권’에 대한 평가라니 놀랍지 아니한가.
여론조사는 어느새 정치에 깊이 간여하고 있다. 거의 모든 선거엔 여론조사가 위력을 떨친다. 후보자를 선정하고, 선거전 판세를 읽는 데 여론조사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오차범위’ 이내 살얼음판 대선 결과를 족집게처럼 짚어내는 ‘출구조사’는 이미 몇 차례 감탄을 자아낸 바 있다.
그뿐인가. 미래의 정치도 여론조사가 ‘점지’한다. 안철수는 여론조사가 잉태한 ‘새 정치의 메시아’다. 바야흐로 정치행위는 여론조사에 의해 그 정당성을 심판받는 시대다. 백성들의 아우성에 꿈쩍하지 않는 박 대통령이 믿는 구석도 여론조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의 허실을 점검해 볼 필요를 느꼈다. 먼저 여론조사 전문가를 만났다. 여론조사기관 ‘리서치플러스’ 임상렬 대표로부터, 여론조사 과정과 그 과학적 의미, 언론 보도의 문제 등을 들을 수 있었다.
여론조사는 통계학이 빚어낸 과학적 산물인 것만은 사실이다. 통계학은 극소수 ‘표본’의 생각에서 거대한 ‘모집단’의 생각을 유추해 낸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있다. 적절한 표본과 설문, 인터뷰 방식, 정교한 과학적 분석 등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우선 적절한 표본 확보의 어려움이 크다는 점이다. 디지털 문명은 세대 간에 전혀 다른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연출한다. 연령대에 따라 소통의 수단과 방식이 다양한 터다. 일부 젊은층에겐 여론조사 기관의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여론조사 업계는 새로운 ‘표본의 풀(표본 집단)’을 구축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천에 어려움이 있다. 시간과 경비 등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터다.
지난 대선 때 유권자는 4000만명을 돌파했다. 요즘 정기적으로 발표되는 여론조사 표본은 대체로 1000명 남짓이다. 대표성이 결여된 표본 1000명이 4000만명의 생각을 대변하는 셈이다. 하물며 표본이 적절하지 못하다면 그 여론조사는 현실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겠는가.
낮은 응답률도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소이다. 최근 언론에 공표되는 정치 관련 여론조사의 응답률은 10%대가 주를 이루고 있다. 한 자릿수 응답률도 심심찮게 발견될 지경이다. 참고로 일본의 최근 사례를 찾아보았다. 지난 연말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한 여론조사 응답률은 60%를 넘었다. 미국 언론은 응답률 30% 미만 여론조사는 보도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임 대표는 “제한된 표본, 그것도 대표성이 결여된 집단을 대상으로 한 모든 여론조사는 각각 ‘하나의 조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여론조사 자체, 곧 ‘생산’의 문제보다는 언론 보도, 곧 ‘유통’의 문제가 크다고 지적했다. 독자에 영합하는 데 이골이 난 언론이 ‘허상’을 ‘실체’인 양 보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겨레>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 보도를 찾아보았다. 지난 11일치 기사 ‘박 대통령 지지율 올랐지만…불통 이미지도 세졌다’의 주요 대목을 옮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새해 들어 상승했다. 신년 기자회견 등을 통한 지지율 관리 전략이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한국갤럽이 지난 6~9일 전국 성인 1219명에게 박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를 물은 결과 응답자의 53%가 ‘잘하고 있다’고 답했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의원은 ‘기자회견과 설 특사 등을 통한 청와대의 지지율 관리가 일정 부분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갤럽이 밝힌 이 조사의 응답률은 17%. 100명 가운데 83명의 생각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보도는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을 ‘사실’로 전하고 있다. 보도는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정치적 전략과 인식의 세계도 함께 보여준다.
<한겨레> 편집국 임석규 정치·사회 에디터를 만나 여론조사 결과 보도에 대한 <한겨레>의 입장을 들어보았다.
-여론조사는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믿는가?
“오차는 있겠지만, 여론의 흐름을 읽는 데 유용한 과학적 지표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표본의 결함, 지나치게 낮은 응답률 등은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현실과의 괴리를 인정한다. 낮은 응답률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 설정은 연구과제다.”
-‘허상’을 ‘실상’으로 호도하는 데 한몫 맡고 있다.
“보도에 신중할 필요성을 느낀다. 여론조사 결과는 ‘하나의 수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도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신뢰도를 보완할 대책이 필요한 것 아닌가?
“여론조사의 과학적 정밀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한겨레>는 특히 ‘정량조사’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 ‘정성조사’를 부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표적집단심층좌담회(FGD)가 대표적이다.”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숫자의 마술’의 폐해는 크다. 박 대통령의 오만도 대표적인 폐해의 하나로 꼽힌다. 새누리당의 기고만장과 민주당의 주눅 든 모습도 여론조사의 ‘집단최면’ 효과로 보인다. 한국을 움직이는 핵심 정치집단의 ‘오판’은 나라의 장래를 그르칠 수 있다. 정치판이 정치판에 가득한 거짓과 위선의 쓰레기를 치우는 데 솔선하는 대신 숫자놀음에 빠진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허상’이 지배하는 정치는 위험하다. 무릇 정치는 산술의 세계가 아니다. <한겨레>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이다.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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