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조카가 결혼했다. 시집 쪽으로는 첫 손자이기도 해서 가족의 감회가 남달랐다. 제일 신난 건 여덟살 난 우리애였다. 형수가 생기고 자기는 도련님이 되었단다. 어른들이 일러준 걸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신랑 부모의 연고지가 아니라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많은 서울에서 예식을 치르기로 했다는 말에 조금 다른 결혼식 풍경을 기대했다. 결혼식 장소는 대부분 신랑 부모가 결정하곤 했다. 신부 하객이 되어 이른 아침 대절 버스를 타고 먼길을 갈 때면 왜 신랑이 먼저인 건지 의아했다. 단 한 번, 신부 쪽에서 예식장을 정한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신부 아버지가 그곳 유지라 신랑 쪽에서 양보한 경우였다. 결혼식 장소 선택에서부터 양가의 힘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면서도 씁쓸했다.
이 결혼만큼은 부모가 아닌 결혼 당사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중 결혼식이나 영화 캐릭터를 코스프레한 이색 결혼식은 아니더라도 후다닥 붕어빵 찍어내듯 해치우는 결혼식은 아닐 것이다. 예전과 달리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뜻깊은 결혼식을 올리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기도 했다.
아쉽게도 결혼식장은 신랑 아버지가 정했다. 평생 교직에 종사한 성품을 짐작할 만한 소박한 예식장이었다. 식장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니 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렇듯 하객이 많다니, 역시 진솔하게 살아온 분이라는 생각에 뿌듯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 눈에 띄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먼 친척은 아닌 듯하고 아무래도 신부 쪽 가족인 듯했다. 하객이라면 저렇듯 종종걸음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축의금을 받는 곳이 두 곳이었다. 각각 신랑 신부 쪽일까 생각했는데 알지 못하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서울이고 주말이라 한 시간 간격으로 연달아 예식이 잡혀 있었다. 그곳이 붐비는 것은 제각각 다른 결혼식에 온 하객들 때문이었다.
조카 친구들의 이벤트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결혼식이었다. 신랑 친구들이 미리 준비한 영상을 틀고 노래를 한 소절씩 나눠 부르면서 신부에게 장미를 한 송이씩 건네는 장면은 아름다웠다. 눈물이 핑 도는데 사진을 찍는다며 가족을 불러내는 바람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렇게 끝난 예식 시간은 32분. 준비한 영상의 소리가 나오지 않아 몇 번 다시 튼 걸 고려하면 채 25분도 걸리지 않았다.
허겁지겁 폐백실로 가서 폐백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다음 예식에 쓸 폐백 음식을 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예식 시작을 알리는, 방금 전 조카 결혼식에서 들었던 녹음된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식당은 넓었다. 세트로 준비된 음식들이 후다닥 상에 차려지고 갈비탕을 다 먹을 무렵 신부 쪽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한복 차림의 중년 여인이 식당에 들어섰다. 조카 결혼식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다른 결혼식의 신부 어머니였다.
떠밀리듯 밥을 먹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지방에서 내려온 하객들이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굼뜬 어른 몇을 기다리느라 금방 출발하지 못했다. 결혼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따라 나왔다. 올림머리는 풀지 못한 채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신부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머리에 꽂은 수많은 핀을 뺄 시간을 주는 예식장은 많지 않았다. 아이가 형수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형수, 이제 나 도련님이라고 불러.” 너무 긴장한 신부는 아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신랑 고향에서 온 관광버스가 떠나고 신혼부부도 자동차를 몰고 예식장을 벗어났다. 후다닥, 날짐승이 홰를 친 것 같은 짧은 시간에 한 쌍의 부부가 탄생했다. 그날 그곳에서 한 시간 간격으로 연달아 다섯 건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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