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논설위원
박근혜 정부의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구하기’ 노력이 목불인견이다. 오류투성이의 책을 안간힘을 써 검인정에 합격시켜 놨더니, 그 책이 학교 현장의 채택 과정에서 0%대의 참패를 기록하자, 이성을 잃은 듯하다. 교학사 구출 특공대로 나선 교육부는 부랴부랴 이 책을 채택하려다 교사·학생·학부모·시민의 항의로 불채택으로 돌아선 학교에 외압이 있었는지 조사하겠다며 감사반을 파견했다. 그래도 효력이 없자 아예 국가가 노골적으로 교과서 내용에 개입할 수 있는 편수 기능 강화나 국정 체제로의 회귀를 꾀하겠다고 나섰다.
백년대계라는 교육 문제를 이렇게 군사작전 하듯 후딱 해치우려는 천박함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건 그 해법이 사리에도 세계적 조류에도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양성과 창의성을 요구하는 시대 흐름에 맞춰 각국의 교과서 발행 제도가 국정에서 검인정으로, 검인정에서 자유발행제로 점차 진화해가고 있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추세다. 세계에서 고작 북한·러시아·베트남·필리핀 정도만 국정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데서도 국정 제도의 후진성을 엿볼 수 있다.
교학사 책이 교육현장에서 외면받은 가장 큰 이유는 수많은 사실 오류와 4·3 사건이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처럼 법률 등을 통해 보편타당하게 확립된 역사적 평가마저 뒤엎으려는 난폭함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마치 교과서 발행 제도에 문제가 있어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건 사태의 본질을 오도해도 크게 오도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미화·찬양하는 내용의 일본 역사교과서가 시민운동의 힘에 막혀 학교에 발을 붙이지 못했을 때는 정부와 모든 언론매체가 이구동성으로 ‘양식 있는 시민의 승리’라고 칭송하더니, 국내에서 비슷한 관점의 교학사 책이 같은 처지에 몰리자 180도 태도를 바꿔 폭력이니 테러니 하며 입에 거품을 무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그 과정에서 일부 험한 언사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걸 전면에 내세우는 건 침소봉대다.
똑같은 사과를 보더라도 배부른 사람과 배고픈 사람의 느낌이 다르기 마련이다. 하물며 수많은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역사적 사실을 어찌 단 하나의 해석이나 관점으로 재단할 수 있겠는가. 보수든 진보든 역사관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것만 옳다고 주장해서는 꼬일 대로 꼬인 ‘역사 전쟁’을 해결할 길이 없다. 양쪽 모두 더욱 겸허하고 열린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시점에서 교육부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다. 바로 원칙과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 당장 검인정보다 선진적인 자유발행제를 채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기왕의 검인정 제도라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힘을 쏟는 게 우선이다. 그 방향은 ‘사실은 엄격하게 점검하되, 사실의 해석, 즉 사관의 다양성은 관대하게 인정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4·19 혁명이나 5·16 군사쿠데타처럼 이미 사회적으로 합의가 이뤄진 역사적 평가는 존중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정권의 성향과 부침에 따라 교과서가 춤추는 걸 막을 수 있다. 검인정이 끝난 뒤에는 학교 현장과 공론의 시장에 평가를 맡기면 된다.
마침 미국의 <뉴욕 타임스>가 14일 ‘정치인과 교과서’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 그들의 정치적 관점에 맞춰 역사를 다시 쓰려고 하고 있고, 이런 위험한 작업이 역사의 교훈을 뒤엎으려고 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를 성찰의 기회로 삼기는커녕 옹색한 해명이나 반박으로 대응하는 박 정부의 속좁은 태도가 안타깝다.
오태규 논설위원
페이스북 @ohta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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