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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박 정권의 극우편향과 당내 민주주의 / 남재희

등록 2014-01-16 19:08수정 2014-01-16 20:18

미헬스가 예로 든 우화의 경우처럼 밭의 구석구석을 파헤쳐보는
당내 민주화의 노력, 그런 노력이 새누리당 안에서 있어야 한다.
언로의 확보이며 이성의 회복이다. 언론에 가끔 보도되는 대로
그 유명한 ‘레이저 광선’에 주눅이 들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박근혜 정권이 그동안 극우에 기울어져서 공안통치를 해온 지가 1년쯤 되니까 이제 슬슬 당내 민주주의의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 같다.

철도파업을 당하여 “케이티엑스(KTX) 수서발 자회사 설립은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정면으로 공격한 유승민 의원이 가장 눈에 띈다.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운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정몽준 의원은 “야당과는 물론 청와대와도 대화다운 대화를 못 해봤다”고 거포를 쏘았다. 이재오 의원은 “공안의 과잉과 정치의 마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민과 권력의 대결 구도를 가져온다는 역사의 경험을 늘 성찰해야 한다”고 신랄하게 분석했다.

이제 공안정국의 겨울에도 아주 멀리서나마 봄의 소식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하다. 당내 민주주의는 본래 집권여당의 문제이다. 야당의 경우에는 대개 당내 민주주의가 부족한 게 아니라 너무 흐트러지고 구심력이 약한 게 문제다.

해방 후 정치사를 보면 자유당 정권에서는 후기에 강경파와 온건파의 갈등이 있었다. 강경파의 핵심은 일제 때 출세주의로 법과공부를 했다는 평을 받는 율사들. 4·19 후의 민주당 정권은 구심력이 걱정되는 상태에서 끝났다. 5·16 후 철권정치를 한 공화당 정권에서도 3선개헌 반대, 각료불신임 찬성투표, 월남파병 반대 등의 이견 표출이 있었다.

신군부 쿠데타 후의 민정당에서는 장영자 사건을 둘러싼 심층에서의 이견, 학원안정법 반대 등이 있었다. 그 후의 노무현 정권에서는 “계급장 떼고 토론해보자”고 대통령에 도전하는 등 당내 민주주의의 과잉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다 알다시피 이명박·박근혜의 쌍두마차였던 셈이다. 야당의 경우도 이른바 3김 시대에는 김영삼·김대중 등 당수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김대중당의 2인자 격인 김상현 의원이 ‘팽’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20세기 초에 나온 로베르트 미헬스의 <정당들>이 아직도 크게 참고가 되고 있다. 독일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스위스에서 잠깐 강단에 섰으나 주로 이탈리아에서 교수로 있던 다국적적 학자인데 독창적인 이론가라기보다는 종합력 있는 학자로 평을 받았다.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정당과 노동조합들을 연구한 결과 보수정당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정당에서도 과두화의 경향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규율과 행정적 일관성이란 내부적인 필요 때문에, 외부에는 닫힌, 그리고 스스로를 영속시키는 과두체제. 그는 이런 경향을 ‘과두체제의 철의 법칙’(iron law of oligarchy)이라 이름지었다.

그는 과두체제를 해결하는 일은 마치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어려운 일로 생각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고 있는 우화를 소개한다.

한 농부가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넓은 밭의 어딘가에 보물이 매장되어 있다고 했다. 아들들이 구석구석 열심히 파헤쳤다. 그러나 허사. 보물은 없었다. 그러나 그다음 농사는 대단한 풍작이 되었다는 이야기.

정당에 있어서의 당내 민주주의의 문제도 그 우화에서처럼 끊임없이 노력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헬스의 결론이다. “과두화와 민주화의 잔인한 경쟁은 끊임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게 책의 마지막 구절이다.

과두체제, 1인 체제가 된 상태에서는 한문성어를 써서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 행세를 한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 등의 해괴한 일이 자주 벌어진다.

직접 경험한 한가지 예를 소개하면.

신군부 정권 때 한 극우 참모가 최고권력자한테 ‘판사를 끼워 넣었지만 법원은 될 수 없는 행정위원회의 판정만으로 문제 학생들을 반년쯤 격리·수용하는’ 학원안정법이란 것을 주입했다. 그 법안에 크게 수긍한 그 권력자의 엄포가 너무나도 지엄하여 그때의 제2인자까지도 내놓고 반대 의견을 말하지 못하였다. 속칭 친위대 의원들도 설쳤다. 그러나 “임금님은 벌거벗었네”라고 밝힌 동화 이야기처럼 한 사람의 무모한(?) 이의제기로 그 법안은 김이 빠져 결국 유야무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 철부지 극우 참모에 전체의 당이 마치 만화의 장면처럼 멍청하게 놀아날 뻔했다. 일은 때로는 희극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때의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은 지금도 대충 기억할 것이다.

비슷한 예를 하나 더 들면.

박정희 정권 말기에 야당의 김영삼 당수를 <뉴욕 타임스> 회견을 트집 잡아 국회에서 제명하자 야당 의원들은 일괄사표를 내어 항의하였다. 그때 우직한 측근참모는 그것도 꾀라고 ‘선별수리’를 내세웠다. 이참에 미운 야당 의원들을 가려내어 그들의 사표만 받아버리면 얼마나 시원한 일이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 주도자는 차지철 경호실장으로 알려졌는데, 그때 그의 위세는 문자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리고 곳곳에 그의 심복들이 쫙 깔려 있었다. 그러기에 그 말도 안 되는 선별수리론은 순식간에 대세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권위주의하에서는 겉 다르고 속 다르기 마련인데, 겉 여론만 듣고 판단했다간 큰 실수를 범하기가 십상이다.

그때 마침 청와대 홀에서 유신 7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선별수리가 대세라는 보고가 못 미더워서였던지 박 대통령은 파티장의 테이블을 돌며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었다. 선별수리가 옳다는, 그래서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합창이 한쪽에서 울려 퍼졌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관심을 가졌던 한 의원은 그의 거듭되는 질문에 뒷머리만 긁적일 뿐 끝내 가부간 답변을 하지 않았다.(그때는 이상한 때라 답변을 안 하는 것이 최선의 부정의 표시였다.) 거기서 박 대통령의 질문도 멈추었다.

용인술의 달인일 것인 박 대통령은 아마 느낌이 이상하다고 여겼던지 의원들 전원 개개인의 선별수리에 관한 찬반을 조사해 올리라고 지시하였다. 일괄사표에 관한 대책을 물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주로 국회의 상임위원회별로 개별조사가 진행되었다. 중앙당 상근 당직자는 그들만 모아 체크하였다. 내가 속했던 모임에서는 압도적으로 선별수리가 말이나 되느냐는 의견이었다. 일괄반려론이다. 그게 정치도의에 맞다. 박 대통령의 처남 육인수 의원까지도 선별수리론에 펄펄 뛰었다. 차지철의 깡패적이라 할 지시가 겉돈 것이다. 한명 한명에 책임 있게 물었을 때는 역시 반응이 달라진다. 그게 이성의 소리가 아닌가.

아마 그 종합보고가 청와대에 틀림없이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일괄반려든 선별수리든 간에. 궁정동에서 밤중에 총성이 울린 것이다.

지나놓고 보면 천하대세에 아무 영향이 없는 일이 되었지만 그때 당시로서는 초미의 중대사였던 일괄반려냐 선별수리냐 여부의 문제는 그런 곡절이 있었다. 이 예화에서도 당내의 자유토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때의 의원들은 분명 회상이 될 줄 안다.

정당이란 일관성 있는 정치노선을 국민에게 제시해야만 한다. 그것이 존재이유다. 그 기본노선의 일관성과 당내 민주주의의 관계는 주의를 요하는 까다로운 문제이다. 정당의 기본노선이 흔들리고 혼란이 초래될 정도로 엉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정당이 공천권을 포기하고 모두를 국민들 투표에 맡기자는 이야기와 비슷해질 수도 있다.

정당의 구심력이 없을 때 외부세력이 개입하여 마구 흔들어 댈 수도 있고, 소수파 세력이 장난을 칠 수도 있다. 야당의 경우에는 사실 그런 우려가 다분히 있다. 집권당의 경우는 현행 헌법상 1인 통치자의 권한이 워낙 막강한 것이기에 그런 걱정은 문자 그대로 기우일 뿐이다.

미헬스가 예로 든 우화의 경우처럼 밭의 구석구석을 파헤쳐보는 당내 민주화의 노력, 그런 노력이 새누리당 안에서 있어야 한다. 언로의 확보이며 이성의 회복이다. 언론에 가끔 보도되는 대로 그 유명한 ‘레이저 광선’에 주눅이 들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 과정에서 혹 한두 사람쯤은 노여움의 번개를 맞아 좌절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남재희 언론인
남재희 언론인

하기는 대통령의 임기가 중반을 지나면 차기 주자가 슬슬 부각되기 시작하게 되고 상황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현직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도 겹치게 되고. 당내 민주주의는 당내에 있어서의 이성적 대화를 말한다. 양식 있는 대화라도 좋다. 이성적 대화, 양식 있는 대화가 당내에서 가능할 때 그 당은 건전해진다.

남재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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