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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난파선의 선원들 / 이재성

등록 2013-12-29 19:17수정 2013-12-30 15:12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며칠 전 <워낭소리>의 제작자 고영재 인디플러그 대표한테서 전화가 왔다. 민영화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데 이제 막 칠레 촬영을 마치고 아르헨티나로 넘어갔다고 했다. 제목은 <블랙 딜>. 관료와 자본, 학자들이 국민을 배제하고 밀실에서 벌이는 은밀한 거래가 민영화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대처리즘(미국의 레이거노믹스)을 수입해 공공부문을 민영화한 대표적인 남미 국가들이다. 고 대표가 전하는 상황은 심각했다. 의료와 철도, 연금, 교육 등 주요 공공서비스의 민영화로 부의 집중이 심화했으며, 각종 요금은 폭등했고, 민생은 파탄났다. 국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좌파 대통령 선출이었다.

그런데 왜 우파 정부는 민영화를 추진할까. 그 해답을 미국의 언론인 토머스 프랭크의 <정치를 비즈니스로 만든 우파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는 자신이 탄 배를 스스로 난파시키는 선원들이라는 뜻의 ‘더 레킹 크루’(The Wrecking Crew)다. 작은 정부를 찬양하며 ‘유능한 공무원’을 적으로까지 규정했던 미국의 보수 우파들이 규제 철폐와 감세, 민영화로 어떻게 나라를 망가뜨리고 사적인 돈벌이를 추구했는지 추적한 책이다. 이를테면 아들 부시 대통령은 연방기관을 평가할 때 얼마나 많은 일자리를 아웃소싱(민영화)했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는데,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덮친 뉴올리언스에서 연방재난관리청이 보여준 치명적 무능함이 그 단적인 결과였다는 것이다. “부패한 정부는 모든 것을 민영화한다”는 촘스키의 주장을 실증하는 내용이다. 대처와 레이건, 부시로 이어진 신자유주의는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눈길을 한국으로 돌리면, 철도 파업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강경노선에 박수를 치며 대처리즘이라는 좀비를 불러들이는 보수 신문과 방송들로 현기증이 난다. 세계 경제와 정치의 흐름을 정말 모르는 건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청맹과니 같은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들이 곁다리로 걸고넘어지는 게 김대중·노무현 정부 탓이다. 민영화는 그때 이미 시작한 거 아니냐는 주장이다.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초국적 자본의 요구에 따른 조처였다는 식으로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나는 당시 민영화 정책의 첨병이었던 기획예산처를 출입하면서 공무원들과 논쟁도 벌이고 비판 기사도 썼다. 아이엠에프가 자금을 빌려주는 대신 살인적인 고금리와 공기업 민영화를 요구했는데,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경제 관료는 없었다. 나는 우리나라 관료들이 미국과 자본 편이라고 생각했다. 구제금융은 핑계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퇴직 뒤 고액 연봉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리가 늘어나는 ‘남는 장사’다. 일종의 ‘블랙 딜’이다. 김대중 정부 당시 포스코와 케이티, 한국전력 등을 민영화했지만, 관료들이 주장했던 ‘주인을 찾아주는 방식의 민영화’를 저지할 수 있었던 건 민주노총을 비롯한 반대세력이 애쓴 결과다.

보수 언론의 말 같지 않은 주장에 답을 하자면, 김대중 정부도 노무현 정부도 당시 세계를 지배한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말하겠다. 세계적 기준으로 보면 이들도 우파 정부 아닌가. 좌파도 아닌데 마음대로 좌파 딱지를 붙여놓고, 필요할 때마다 우파 정책의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하는 게 이 나라 보수 언론의 전매특허다. 좌우를 떠나 정말 나라를 생각한다면, 철 지난 ‘난파선 놀음’을 당장 그만두라고 말해야 한다.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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