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규 정치·사회 에디터
다시 맞는 갑오년,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린다. 세상을 쏘아보는 이글거리는 눈빛. 짓뭉개진 다리에 손발이 묶인 채 들것에 실려가며 그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가. ‘눈떠라 눈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 동편도 서편도 치닫는 바람/ 먼저 떠난 자 혼자 죽는 바라/ 동렬(同列)에 흐느낄 때 만나는 사람’(황동규, ‘전봉준’)
120년 전 갑오년은 갑오농민전쟁, 갑오개혁(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급변의 해였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 백성들이 부르는 참요 소리가 요란했다. 갑오년(1894년)에 떨쳐 일어나지 않고 을미년(1895년)에 우물쭈물 미적대다가 병신년(1896년) 되면 때는 늦으리라는 내용이니,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투쟁가다.
갑오농민전쟁 2회갑을 맞는 2014년, 다시 총파업가가 울려 퍼진다. ‘나가자 형제여/ 방방곡곡 대동단결로/ 말하라 형제여/ 총파업투쟁으로 말하라’ 철도노조의 민영화 반대 파업은 최장 기록 경신을 거듭하고 있다. 의료계도 원격의료, 영리병원 저지를 외치며 총파업을 예고한 상태다. 어느 정권에서나 노조 파업은 있었다. 문제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무시해버리는 정권의 태도다. 문명국에서 노동운동의 심장부에 공권력을 투입한 전례가 있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얼마 전 ‘경장’을 갑오년의 화두로 꺼냈다. 120년 전 경장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번엔 꼭 성공하자며 친절하게 뜻풀이도 해줬다. 해현경장(解弦更張)에서 유래한 경장이란 말은 느슨해진 거문고 줄을 풀어서 다시 팽팽하게 조이지 않으면 조화로운 소리를 낼 수 없다는 뜻이다. 대통령의 의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철도노조 파업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파노라마’도 박 대통령에겐 그저 줄이 느슨해진 탓으로 비치는 거다. 이런 현실 인식에선 해법이 단순하다. 그냥, 조이면 되는 거다. 대통령의 뜻이 이러니 공권력의 기세에 거침이 없다.
박 대통령이 120년 전 갑오경장을 얘기하면서 같은 해에 발발한 농민전쟁을 애써 외면한 것은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다. 대통령 퇴진 요구까지 나오는 판에 백성들이 봉기한 역사를 굳이 거론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비극도 그 시발은 부산·마산의 봉기가 아니었던가.
따지고 보면 갑오경장은 한바탕 난리통을 겪고 정신이 번쩍 든 지배층이 ‘이대로 그냥 가면 도저히 안되겠구나’는 쪽으로 현실 인식을 바꾸면서 나온 거다. 아래로부터 솟구친 갑오농민전쟁의 압력을 위에서 제도적으로 수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지원을 업은 친일개화파 관료들이 추진한 게 갑오경장이지만 이마저도 농민전쟁의 압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은 헌법으로 보장한다. 여기엔 제도화된 분출구가 막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파국을 막자는 취지도 담겨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도 후보 시절엔 청계천 전태일다리를 방문해 전태일 동상에 꽃다발을 바치는 등 노동 포용의 손짓을 내보였다. 하지만 당선 이후엔 ‘강하게, 더욱 강하게’가 노조를 대하는 기본 원칙인 것처럼 보인다. 제도화된 분출구가 막힌 사회는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커진다.
최근 세종시를 방문한 대통령은 ‘퀀텀점프’(Quantum Jump·대도약)를 주문했다. 물리학 용어인 퀀텀점프는 계단을 뛰어오르듯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느슨해진 줄을 조이면 우리 사회가 도약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런데 현의 줄을 조이다 보면 언젠가 툭 끊어지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국민의 분노에도 퀀텀점프가 올 수 있다는 점을 대통령은 모르는 모양이다.
임석규 정치·사회 에디터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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